윤민용 안성시기로회장
윤민용 안성시기로회장
나의 어린 시절 고향의 봄을 돌이켜 보면 그리 낭만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먹을 것이 턱없이 부족했던 시대라 늘 배가 고팠다. 보릿고개라는 말이 사라져 버린 지 오래라 젊은 사람들은 보릿고개를 잘 모를 수 있다. 햇보리를 수확할 때까지 넘기기 힘든 고개, 춘궁기라고 사전적 의미만 알아도 훌륭하다. 어린 학생들은 보리를 심어 놓은 언덕쯤으로 생각한다니 헛웃음이 절로 난다. 보릿고개가 태산보다 높다는 속담도 있다. 한없이 높은 고개, 굶으며 넘던 고개, 누군가는 죽어서 못 넘은 대한민국의 보릿고개.

이제는 국어사전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옛 추억 속의 말이라고 여겼던 보릿고개가 1인당 국민소득 3만달러시대를 맞은 대한민국 사회에 여전히 존재한다면 믿을 수 있겠는가? 바로 '시니어 보릿고개'다. 우리나라의 노년층은 시니어 보릿고개라는 말이 나올 만큼 삶이 고단하다.

예전에는 나이든 어르신은 그 마을 구성원 모두에게 존중의 대상이었다. 그 어르신의 농사의 지혜가, 삶의 지혜가 가치를 인정받았으며, 집안의 정신적 지주이자 버팀목이었다.

오늘날은 어떤가? 낡은 지식과 구태의연한 사고방식을 지닌 구세대이고, 젊은 세대의 짐이라고 생각하고 있진 않은가? 후손에게 정성 어린 봉양은 고사하고 기본적인 부양조차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자식농사 잘 지으면 노후 걱정 없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은 아니다. 자식에게 노후를 기대는 시대는 지났다. 자식들도 먹고살기 힘들다고 아우성이다. 자식에게 부담주기 싫으니 어쩔 수 없다. 연골이 다 닳아 없어지고 허리가 꼬부라질 때까지 밥벌이하다가 그마저 힘들면 기초연금에 의지해 보릿고개를 넘기는 수밖에.

노인의 3대 문제는 빈곤, 질병, 고독이다. 흔히 노인 3고(苦)라고 한다. 우리나라 노인들은 빈곤과 건강 문제에 가장 큰 관심을 가지고 있고 그다음으로 여가 선용과 오락 및 외로움을 달래주기를 원하고 있다. 우리나라 65살 이상 노인 빈곤율은 48%로 OECD 회원국 평균보다 4배 높고, 노인 10명 중 6명이 3개 이상의 만성질환을 앓고 있고, 5명 중 1명은 독거노인이란다. OECD 국가 중 빈곤율과 자살률 1위라는 부끄러운 기사도 보인다. 몸 아픈 것이야 생로병사의 하나인지라 감내하고 살아간다 해도 내 청춘을 바친 이 나라가 한강의 기적이라 불릴 만큼 잘살게 됐는데 노년에 이르러 또다시 보릿고개와 마주하게 될 줄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젊은 시절 허리띠를 졸라매고 잘 살아보자고 밤낮없이 일하며, 개인보다는 사회와 국가를 위해 살아온 세대들인데 어쩌다 이런 처지가 되었나? 서글프다.

하지만 고맙게도 내 고향 안성에서 어르신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주었다. 만 70세 이상 지역 주민을 대상으로 어르신 건강지킴이 의료비 지원 사업을 시행한다는 반가운 소식이 들렸다. 안성지역화폐를 지급해 지역 병·의원 및 약국, 약방 등에서 사용할 수 있다고 하니, 지역 어르신들에게 꼭 필요한 혜택이 아닐 수 없다. 내 고향이 나를 잊지 않고 따뜻한 손길을 내밀어 준다는 사실이 감동을 더한다. 지역경제 활성화 효과도 기대되니 일석이조, 아니 일석삼조라 해도 무방하다. 그러나 반가움도 잠시, 이 사업이 난관에 부딪혀 시행이 불투명하다는 이야기가 들려온다. 이유를 추측건대, 의료비 과잉 지출 걱정, 건강보험재정에 영향을 준다는 등 보건복지부에서 우려를 표명하는 목소리 때문이 아닐까? 안성시가 추진하는 어르신 지원 사업이 바로 정부가 제시한 '혁신적 포용국가'라는 목표에 부합하는 사업이다.

현재 대한민국은 본격적인 고령사회에 진입했다. 모두가 걱정한다. 노년층이 늘어나니 그만큼 사회가 부양해야 하는 부담이 커지고 늘어나는 복지예산을 어떻게 감당할 것이냐고. 대한민국 경제발전의 밑거름이 된 우리 세대가 보릿고개로 시작해 보릿고개로 생을 마감하는 비극은 없어야 한다.

어르신 건강지킴이 의료비 지원 사업은 마을 어르신에 대한 최소한의 예우이다. 안성시의 선한 정책 의지가 왜곡되고 오도돼 어르신 건강지킴이 사업이 좌초되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어르신들 마음의 허기까지 달래줄 희소식이 하루빨리 전해지길 고대한다.

/윤민용 안성시기로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