둑 쌓을수록 무너지자 스님 말대로
사형수 함께 묻어 쌓으니 멀쩡
그 위쪽에 생긴 곡창지대 '호조벌'
바다땅에서 자란 쌀 '햇토미' 생산
저어새등 철새도래지로도 유명


안광률 경기도의원(더불어민주당·시흥1)
안광률 경기도의원(더불어민주당·시흥1)
1971년 필자는 세상에 목청껏 신고식을 하며 대한민국 국민이 되었다. 찰스 디킨스가 그랬던가 '세상에 태어난 아기는 누구나 가치가 있다'고. 나는 시흥시에 소재한 신현역 앞 포동에서 태어나고 자라고 그 자락에서 삶을 가치있게 살려고 노력하고 있다. 내 고장은 어업의 전초기지인 포구(浦口)가 있던 마을이라 포동이라 불린다. 1960년대까지 고기잡이배가 들고나던 바닷가 마을로 학이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형상으로 학의 눈썹처럼 생겼다 해서 지어진 학미산 자락에 안겨있다. 뜨거운 여름! 필자가 나고 자란 포동의 전설을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예전에 시흥에 더 많은 농경지 조성을 위해 우리 마을과 하중동 샛터마을 간 방죽을 쌓아주는 공사를 하는데 방죽이 다 쌓아지면 허물어지고 다시 쌓으면 허물어지는 등 방죽 쌓기 헛공사가 되기 일쑤였다. 이러니 방죽 쌓기에 나섰던 관리와 일꾼들의 좌절은 일상이 되고 일을 다시 시작하자니 두려움부터 앞섰다고 한다. 그러던 차에 이곳을 지나가던 스님 한 분이 방죽 쌓는 작업현장을 보고 "저 방죽을 제대로 막으려면 이렇게 하면 안 되오. 절대 쌓일 수 없소"라고 말을 건넸다. 실패를 거듭했던 일꾼들은 스님의 말에 귀를 쫑긋이 세우며 무슨 묘책이 있는지 알려달라 다그쳤고 스님은 "묘책은 있으나 해낼 수 있을지가 의문이다"라고 이야기하며 더 이상 말을 하기를 꺼렸다 한다. 이에 좌절을 다시금 경험하기 싫었던 일꾼들은 스님이 답을 준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결연한 의지와 발을 동동 구르며 애원을 곁들인 결과, 스님은 마음을 굳힌 듯 묘책을 이야기한다. 방죽을 쌓는 날짜를 알려주고 "사람 셋을 같이 생매장하여 그 위에 방죽을 쌓으면 된다"는 말을 전한다.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은 아연실색했고 넋을 잃고 있다 정신을 차리고 스님에게 그 사람을 어떻게 구할지 물으려고 하자 스님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후였다고 한다.

이 사실을 원님에게 고하니 원님도 방도를 찾지 못해 고민하던 차에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그는 바로 편지를 써 사람 편에 한양의 금부도사에게 보냈는데 '중죄인 중 사형 선고를 내린 자를 이곳으로 보내 여기서 사형집행을 청한다'는 내용을 중심으로 위아래 사정을 자세히 적었다. 상부에서도 어차피 사형을 집행할 죄인이라면 방법의 차이는 있으나 한편으로는 방죽을 쌓는데 성공하고 많은 농경지가 확보된다면 그것도 생각해 볼 일이었다. 그리하여 한양에서 끌려 내려온 사형수 세 명이 이 방죽을 쌓는 흙 속에 함께 묻힌 것이었다. 그러고 나니 그 스님의 말대로 다시는 무너짐이 없이 끝까지 쌓아 올려 오늘의 방죽이 형성된 것이라 전해진다.

그 방죽이 학미산 기슭과 하중동 새터마을에 걸쳐있다 해 우리 마을에 '걸뚝'이란 이름이 붙여졌고, 그 방죽 위쪽에는 많은 전답이 생겨 지금도 많은 쌀을 생산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당시까지 어업을 중심으로 하던 마을의 일상이 농업과 어업을 함께하는 삶으로 변한 것이다. 당시 조성된 농경지가 지금의 미산동, 은행동, 매화동, 도창동, 포동, 물왕동, 광석동, 하상동, 하중동의 농경지가 이에 해당하며 지리적으로는 시흥의 중앙부에 자리한다.

호조방죽으로 생겨난 150만평 넓이에 달하는 시흥시 최대의 곡창지대 호조벌에서는 말 그대로 바다땅에서 자란 쌀 '햇토미'(海土米)가 생산되며 저어새 등의 철새도래지로도 유명세를 타고 있다. 장마전선이 오르락내리락하다 올라가니 뜨거운 무더위가 인내심의 한계치를 넘나든다. 야속하게도 도로를 걸을 양이면 이글거리는 태양 아래 이마에 고인 땀은 넘쳐내릴 듯 방울을 더한다. 그러나 호조방죽에 얽힌 전설을 생각하면 무더위도 잠시나마 잊히지 않을까 한다.

/안광률 경기도의원(더불어민주당·시흥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