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온사리 경찰 주재소 앞에서
'대한 독립만세' 외침… 항일 서막
새로운 100년의 출발선
코로나·불황 극복 또 힘 합칠때

일제강점기 잔악한 식민 통치 속, 독립을 선언하고 대규모 만세 시위를 벌여가며 격렬하게 저항한 항일 독립운동 기념일, 3·1절이 100년을 넘어 새로운 100년의 출발선에 있다. 1919년 3월 1일, 파고다공원에서 민족대표 33인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며 우리나라가 자주독립국가임을 선언했다. 오욕과 치욕의 역사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우리는 101년 전 대한민국 독립을 위해 순국하신 선열들의 항일운동을 추모하고 기념한다.
필자의 고장 광명에서도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항일 운동을 전개했다. 1919년 3월 27일 밤, 노온사리 경찰 주재소 앞에서 당시 소하리에 거주하던 이정석이 "대한 독립 만세"를 목청껏 외치고, 그 다음날 이정석이 체포되어 노온사리 경찰관 주재소에 끌려간 것이 광명지역 항일운동의 서막이다.
이정석의 아버지 이종원(李宗遠)은 아들이 주재소에 끌려가자 같은 동네에 사는 최호천(崔浩天)의 집으로 뛰어갔다. 당시 배재고등학교에 재학 중이었던 최호천은 만세 시위가 격렬해지자, 학교에서 휴교령을 내려 고향집에 돌아와 있었다. 그리고 최호천과 마찬가지로 배재고등학교 재학생이었던 윤의병(尹宜炳)도 고향에 내려와 있었다. 동네 사람을 통해 노온사리 경찰관 주재소에 이정석이 잡혀 있다는 소식을 접한 윤의병은 마을 사람 20여 명과 함께 소하리 내대촌 주막거리로 향한다.
도착하자 그곳에는 최호천이 동리 사람 100여 명과 함께 있었고, 이후 유지호(柳志浩)와 최주환(崔周煥) 등도 소식을 듣고 달려 나오면서 200명 가까운 사람들이 모이게 된다. 사람들은 몽둥이와 돌로 무장한 채 먼저 주재소를 에워싸고 있다. "이정석을 내놓아라"라고 외치며 주재소 앞 게시판을 부수고 시위했다. 그리고 윤의병과 최호천은 시위대를 두 패로 하여 이정석을 체포하였던 조선인 순사들을 잡으러 다녔다.
결국 잡지 못하고 다시 주재소에 모여, 독립 만세와 이정석의 석방에 목청을 높인다. 주재소 안에 있던 일본인 순사 아카마쓰(赤公)는 기세에 눌려 이송된 이정석을 다음날 풀어 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다음날 약속은 거짓으로 하고 시위대 모두를 잡아들였다.
이 사건으로 이정석은 대구복심법원에서 벌금 30원(圓)을 언도받고 출옥했고, 최주환과 유지호는 1년 6월, 윤의병은 2년간 옥고를 치렀다. 최호천은 궐석 재판에서 징역 4년을 선고받았다가 1920년 말에 체포되어 2년 동안 옥고를 치렀다. 이 같은 광명의 3·1 독립운동은 전국적 항일운동에 이바지했으며 중국 등 다른 나라의 독립운동에 적잖은 영향으로 작용했다.
이처럼 우리민족은 과거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 엄청난 국난의 위기에서도 똘똘 뭉쳐 어려움을 극복해왔다. 일제강점기 국채보상운동이 IMF 시절 금 모으기 운동으로 이어지듯, 힘들 때일수록 온 국민이 똘똘 뭉쳐 결기했다. 올해 들어 경자균란(庚子菌亂), 입춘불길(立春不吉)이라는 사자성어가 오르내리는 것은 작금의 어려운 시대 상황을 대변한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확산과 공포로 국민들은 활기를 잃었으며 가짜뉴스 확산, 마스크 매점매석, 이에 따른 경기침체 등 그 어느 해보다 어려움이 엄청나다.
이런 어려운 시기에 다가오는 삼일절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게 느껴진다. 삼일절을 계기로 우리가 처해 있는 바이러스의 역습, 경제 불황을 극복하고 대승적 차원에서 온 국민의 힘을 모아야 한다. 산적한 문제에 힘과 지혜의 역량을 발휘할 시점이다. 또한 다가오는 삼일절을 맞이하여 조국 독립을 위해 헌신하신 순국선열과 애국지사들의 위훈을 기리고, 그분들의 희생에 대한 보훈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하는 3월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오광덕 경기도의원 (문화체육관광위원회·광명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