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적 신앙생활·삼일여학교 정신적 지주
3·1운동활동 체포 '조선독립 정당함' 역설
석방후 곡물상 운영 사회운동가로 맹활약

김세환은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48인 중에 한명이었으며, 기독교 측 대표였다. 그는 독립운동가로서 하나님의 아들이자 교육자였으며 지역사회운동가였다. 김세환은 1889년 11월 18일 수원시 남수동 242번지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남수동 옆 보시동에 1901년 감리교회가 들어섰는데 지금의 북수동 종로교회다. 그는 소년시절부터 이곳을 출입하면서 기독교 신앙 뿐 아니라 교육가로서 또는 독립운동가로서의 꿈을 키워 나갔다. 이후 서울의 관립 외국어학교로 진학하여 공부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중앙대학에서 신학문을 배웠다.
일본에서 돌아온 김세환은 고향 수원에서 교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수원상업강습소 직조 감독관으로 일하면서 선생이 되어 학생들을 가르쳤다. 또한 1913년 삼일여학교 학감으로 부임하여 학교를 자주 비우는 밀러 교장의 빈자리를 대신하는 역할을 하였다. 삼일여학교를 새롭게 단장하는 등의 열성을 보였고, 학교 건물에 한반도 지도를 조각해 넣음으로써 학생들과 학교를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김세환은 삼일여학교에 재직하는 동안 학교의 기틀을 만들었고, 1919년 민족사적 분수령이었던 3·1운동에 학생들의 정신적 지주로서 함께했다.
김세환은 YMCA 간사였던 박희도를 통하여 1919년 2월 10일쯤 3·1운동 준비 모임에 참가하였다. 이에 충남지역과 수원지역의 조직 책임자가 되어 활동하였다. 충남 해미의 김병제, 수원 남양교회 동석기, 수원 종로교회 임응순, 오산교회 김광식, 이천교회 이강백 등을 만나 3·1운동의 지방 확산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러다가 3월12일 서울에서 체포되었다. 법정에서 그는 "아무리 세계대세로 병합이 되었다 하더라도 항상 가슴속에 원한을 품고 있었는데 모든 물건을 대할 때 초목에서 흐르는 이슬도 눈물이나 아닌가 하는 의심을 품을 지경이었다"라고 조선독립의 정당함을 논리정연하게 역설했다. 그리고 재판장이 "이후에도 조선의 독립을 위해 계속 운동할 것인가?"를 물었을 때 조금의 망설임 없이 "그렇다"라고 짧고 명료하게 대답하여 방청객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김세환은 1920년 10월에 석방되어 수원으로 돌아왔다. 일제의 감시와 간섭으로 삼일여학교 교사로 복직하지 못하고 수원시내에서 곡물상을 운영하며 사회활동과 수원지역의 대표적인 유지로 역할하며 여러 사회단체를 지원하는 활동을 펼쳤다. 1928년 8월 신간회 수원지회장으로 선출되기도 하였고 수원체육회를 조직하여 회장을 역임하는 등 지속적으로 민족주의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후 해방된 조국의 자유를 느꼈으나 1945년 9월 16일 수원의 자택에서 운명하였다. 1963년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 받았고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지난 2019년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국가는 물론 각 지자체 별로 기념행사와 순국선열들의 뜻을 기리기 위한 행사가 많이 열렸다. 수원시는 지자체에서는 처음으로 2018년 '수원시 3·1운동·대한민국 임시정부수립 100주년 기념사업 추진위원회'를 발족했고 2019년 시민추진위원들을 중심으로 수원지역 항일 독립운동 가치를 재조명하고 기념하며 기록하는 사업을 적극적으로 펼쳤다. 그리고 시민들의 자율적인 성금을 바탕으로 '수원시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 상징물'을 수원시청 앞 올림픽 공원에 건립했다.
더불어 수원박물관을 중심으로 그동안 꾸준히 독립운동가들을 발굴하여 국가의 포상을 이끌어 내며 이름 없는 독립운동가들의 업적을 기리고 있다. 2020년 3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김세환과 수원의 독립운동가들의 숨결을 수원박물관에서 느껴 볼 수 있다. 역사는 잊어버리는 자의 몫이 아니라 기억하는 자의 몫이고 기억하는 역사는 오늘의 삶과 미래를 여는 삶의 밑거름이 될 것이다.
/이동근 수원박물관 학예연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