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이 발발했다.
아무런 대비가 없던 한국군은 속절없이 북한군의 공세에 밀려 계속 남하할 수 밖에 없었다.
이 소식을 들은 미 극동사령관 맥아더 장군은 6월 30일 '지상군의 한반도' 투입을 건의했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 규수지방에 주둔하고 있던 스미스부대(미군 24사단 제21연대 1대대)가 곧바로 한국전에 투입된다.
이것이 바로 오산 죽미령 전투의 시작이다.

540명으로 구성된 특수임무부대는 7월 3일 평택에 도착, 평택의 북쪽과 안성 북쪽에 부대를 배치하고, 지휘소를 평택에 뒀다.
스미스 중령은 1941년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할 때 하와이 오아후 섬 바버스(Barbers) 방저진지 구축 경험을 토대로 지형정찰 후 오산 죽미령에 방어진지를 구축하려는 계획을 세웠으나 "평택-안성선을 점령하라"는 처치 전방지휘소장의 명령으로, 죽미령에 방어진지 계획은 무산됐다.
4일 오전 포병대대가 평택에 도착했고 또 한 번의 지형정찰을 나선 스미스 중령은 오산 죽미령에서 1.8㎞ 떨어진 수청리 일대에 포병 진지를 선정했다. 정찰을 마치고 돌아오던 그날 오후 사단장으로부터 새로운 작전계획이 전달됐다.
스미스 중령이 건의한 오산 북방 진지를 확보하라는 명령이었다.
죽미령은 오산 북방의 약 5㎞에 위치한 조그마한 능선이다. 경부국도와 철도를 모두 내려다 볼 수 있어 방어거점으로는 가장 좋은 지형이었다. 현재 오산시 외삼미동 일대로 중앙에 주봉인 반월봉(117m)을 두고, 서쪽 왼쪽에는 여계산(159m)과 무명고지(99m), 동쪽 오른쪽에는 92고지가 좌우로 병풍처럼 펼쳐져 있다.

스미스 부대는 4일 밤 12시가 지나서야 평택을 출발해 오산으로 향했다. 죽미령으로 향하는 도로에는 수원 함락으로 도망치는 피난민과 국군으로 가득 차 5일 새벽 3시가 돼서야 죽미령에 도착했다. 날씨도 좋지 않았다. 비까지 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마냥 기다릴 수만은 없는 상황이었다. 스미스 중령은 기관총과 로켓포, 곡사포 등을 죽미령 곳곳에 배치했다. 진지 구축을 마치고 식사를 하던 부대는 전쟁을 금방 끝내고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리라는 희망이 있었다.
오전 7시 날이 잠시 좋아졌고, 스미스 중령과 반월봉에서 포병 관측장교과 함께 수원 지역을 관찰하고 있었다. 7시 30분 수원에서 8대의 T-34 전차를 발견했다. 즉시 전투대세 돌입을 명령했다.
그러나 스미스 부대는 당시 최강이라 불린 T-34에 대해 아무런 정보가 없었다.
8시 15분께 북한의 전차가 보병 진지 1.8㎞에 도착했을 때 최초의 발포 명령이 떨어졌다. 105㎜ 곡사포 4발이 전차에 명중했지만, 북한의 전차는 아무일 없다는 듯 남하를 계속했다. 전혀 피해를 주지 못한 것이다.
이어 75㎜ 무반동총의 사격, 85㎜주포와 7.62㎜ 기관총 난사에도 북한군의 전차는 아무렇지 않은 듯 경사로 유유히 통과했다.
8시 30분 선발 전차가 죽미령을 넘어가려는 찰라 105㎜ 곡사포가 북한 전차의 후면을 공격 2대의 전차를 무력화 시켰다. 3번째 전차는 무력화된 전차를 밀고 속절없이 남하를 계속했다. 이후 4대씩 짝을 이룬 전차부대는 간격을 좁히며 9시까지 총 33대가 죽미령을 넘어갔다.
9시에는 북한군의 전차가 지나가면서 도로에 설치된 전화선이 절단돼 보병 통신이 중단됐다. 지프차량의 휴대용 무전기도 비에 젖어 고장나 얼마 사용하지 못하고 오전 11시 끊어졌다. 포병의 지원 사격도 불가능해진 것이다.
10시 15분 북한군의 마지막 전차가 죽미령을 넘어갔다.
2시간에 걸친 대전차전에서 스미스부대는 적 전차 33대 중 4대를 완파하고 3대를 반파하는 전과를 얻었지만, 105㎜ 야포 1문 파괴 2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스미스부대에 불안감이 퍼지고 있었다.




전차부대가 지나간 1시간 후 3대의 전차를 앞세운 북한군 보병이 목격됐다. 5천여명에 달하는 북한의 군대는 유유히 남진을 이어갔다.
11시 45분 진지 900m까지 다가오자 스미스 중령의 공격 명령이 떨어지면서 북한군과의 첫 백병전이 벌어졌다.
공격을 받은 북한군은 전차포와 기관총을 맞섰다. 보병부대는 죽미령을 에워싸고 공격의 강도를 높였다. 백병전이 이어지면서 사상자들이 늘어났다. 더이상 버틸 수 없었다. 오후 2시 30분 스미스중령은 위포(은계동)로 철수명령을 내렸다.
위포에 모인 부대원은 185명에 불과했다.
이렇게 6시간 15분에 걸친 전투는 스미스부대의 패배로 끝이 났다. 그러나 죽미령 전투에 대한 평가는 긍정적이다.
보병이 38선에서 대전까지 7시간 가량 걸린다는 것을 예상하면 일부 군사전문가들은 대략 14일간의 시간을 벌어준 셈이라고 평가한다.
전투에서는 패배했으나 전략에서는 승리한 전투. 이것이 6·25전쟁 최초의 유엔군 참전 죽미령 전투다.
결론적으로 단 25일만에 전투를 끝낼 것이라는 북한의 계획은 죽미령 전투(6시간 15분)로 인해 3년 1개월 3일까지 미뤄졌다.
오산/최규원기자 mirzstar@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