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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 남은 드라마 女주인공 대사
대기업 부장·파견직 직원의 '우정'
망가져도 행복할 수 있음 보여줘
누군가에 '선한 영향력' 줄수있다면
그것만으로도 '괜찮은 인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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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은 문화평론가
"밥 좀 사주죠." 드라마 '나의 아저씨' 속 대사다. 여자 주인공 지안(아이유 분)이 남자 주인공 동훈(이선균 분)에게 말 그대로 툭, 던지는 짧은 대사. 명대사가 유난히 많은 것으로 유명한 이 드라마 속 대사 중에서 마음에 가장 오래 남았던 말이기도 하다.

대기업 부장인 동훈은 처음 함께 밥을 먹으면서 파견직인 지안의 존재를 제대로 인식하게 된다. 두 주인공들만 밥을 먹는 건 아니다. 드라마는 상당 부분을 할애해 밥을 먹고 술을 마시고 밥상을 차리고 치우며 밥이나 술을 먹자고 권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조기축구회가 활발하고 동네만의 건배사가 따로 있는 동훈의 동네 사람들, 매일같이 만나는 삼형제들은 만나면 밥을 먹거나 술을 마신다. 밥 한 번 먹기도 쉽지 않은 데면데면한 사이이던 둘은 서로의 상처를 내보이게 되고, 자신도 모르게 치유하고 치유받아가면서 밥도 먹고 술도 마시는 사이가 되어간다. 남녀간이지만 사랑은 아니다. 연민이나 동정도 아니고, 뭐라고 규정할 수 없지만 친구보다 가까운 관계로 발전하는 느낌이다. 그렇게 동훈은 계약직도 아닌 파견직 직원인 지안에게 신경써준 최초의 사람이 되고, 외롭고 힘들기만 하던 지안의 인생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된다.

그렇게 두 사람은 만남을 이어간다. 끈끈하다고 할 수 없는 사이지만, 감정의 농도는 꽤 진하다. 두 사람의 첫 건배, 서로를 마주보고 짓던 첫 웃음, 늘 우울하기만 했던 지안의 첫 미소는 그래서 감동적이었다. 거창한 자리도 아니고 그저 동네 술집에서 맥주 한 잔을 나눴을 뿐인데 두 사람은 그 순간 정말 편안하고 좋아 보였다. 이성간의 사랑이 아니어도 그렇게 좋을 수 있고,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참 다양할 수 있구나 싶은 장면이었다. 사람이 살다보면 누군가는 어떤 식으로든 마음에 남게 된다. "어디서 어떻게 만나든 너가 잘됐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하는 동훈의 마음이 좋아보였던 것은 이런 말을 하고 헤어지기 쉽지 않다는 걸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내 인생이 네 인생보다 낫지 않고, 너 불쌍해서 사주는 거 아니고 고마워서 사주는 거야"라고 말하는 부장이라니, 판타지에 가깝지 않은가? 처음에는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했지만 드라마를 보다 보니 적어도 이 드라마 속에서만큼은 충분히 가능한 일처럼 느껴졌다.

지안의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동네 사람들이 자기 일처럼 와서 도와주고 자리를 함께해주며 말없이 지안을 위로하는 모습도 그랬다. 코로나19로 조문조차 조심스러운 요즘이라 더 좋아보였는지도 모르겠다. 사업 실패로 돈 없이 사는 동훈의 큰형은 화환 하나 없던 썰렁한 빈소에 모아둔 비상금을 탈탈 털어 화환을 채운다. 비용 대비 효율성을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비상식적인 행위다. 어차피 화환은 장례식에만 필요하고 가져갈 수도 없는데 그 하루 이틀을 위해 저 돈을 쓴다고? 게다가 지안은 내가 도움을 주면 줬지 나에게 뭘 해줄만한 사람도 아니다. 천만원이라는 거금을 쓰고도 "내 생에 가장 의미있는 돈을 쓰게 해줘서 고맙다" 라고 말할 수 있는 마음이라니! '동네도 망가진 것 같고 사람들도 다 망가진 거 같은데 전혀 불행해보이지 않는' 동훈의 동네 사람들은 그렇게 "망해도 괜찮은 거구나, 아무것도 아니었구나. 망가져도, 행복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마지막회, 서로의 길을 가게 된 동훈과 지안은 정말 우연히 만나 인사를 나눈다. 동훈은 "지안, 편안함에 이르렀나"를 묻고 지안은 말 그대로 편안하게 웃는다. 단 한 사람의 관심과 애정이, 누군가의 인생을 전혀 다르게 바꿀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걸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가상의 인물이지만 그제서야 이름대로 편안함(安)에 이른(至) 지안을 나도 모르게 응원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어떻게 보면 두 사람은 고작 3개월 한 회사에서 일한 것뿐이니 상사라고 하기도 애매한, 뭐라 규정할 수 없는 관계에 가깝다. 하지만 오래 함께했다고 좋은 것이 아니며, 짧더라도 긴 여운으로 남아있는 사람도 있기 마련이다. '10년 후든 20년 후든 길에서 만나면 반갑게 아는 척 할 수 있는' 사람을 만들어가는 것, "밥 좀 사주죠"라고 이야기하거나 나에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생기면 좋겠지만 꼭 누군가와 인연을 만들지 않아도 된다. 드라마 속 동훈처럼, 누군가의 인생에 '선한 영향력'을 보탤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그 사람의 인생은 꽤 괜찮은 인생일 테니까.

/정지은 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