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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에서 부터)1 1987년 회장 취임식에 참석한 이건희 회장. 2 2004년 반도체 설비를 방문해 방호복을 입고 있는 이건희 회장. 3 2006년 두바이를 방문한 이건희 회장. 4 2011년 4월 21일 삼성 서초사옥 집무실에 처음 출근 모습. /연합뉴스·삼성 제공

유년부터 과학 관심 '무한탐구' 휘호
"마누라·자식 빼고 다 바꾸라" 지시
1993년 용인 D램 양산라인 도약 발판
'삼성타운 수원' 넘어 화성·평택 확장
인천 송도 '바이오 분야' 전진기지로


■ 글로벌 거인기업 일궈낸 2세 경영인

고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은 삼성을 한국 최고의 기업에서 글로벌 거인 기업으로 성장시킨 성공한 2세 경영인으로 평가받는다. 1942년 대구에서 출생한 고인은 이병철 삼성 창업주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과학에 대한 관심이 남달라 평생 '무한탐구'(無限探究)란 휘호를 즐겨 썼다고 한다.

개를 기르는 취미를 가지고, 영화에 탐닉하는 등 범상치 않은 유년시절을 보낸 것으로 전해진다. 고교시절엔 레슬링부에 들어갔고, 대학시절엔 자동차에 심취하기도 했다. 서른에 접어들어서도 '기술 산업'에 대한 관심은 여전했다.

집적회로를 만드는 한국반도체가 파산 위기에 처하자 자비를 들여 한국반도체 지분 50%를 인수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한국비료 사카린 밀수사건'의 영향으로 후계 구도가 흔들리며 삼남 이 회장에게도 기회가 주어졌다. 1987년 창업주인 이병철 회장이 유명을 달리하자 이 회장은 곧장 경영권을 승계받고 그룹을 이끌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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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왼쪽)와 유년시절 이건희 회장. /삼성 제공

■ 경기도·인천과 깊은 인연 맺은 이건희 회장

"사람이 자기를 알기는 몹시 어려운 일이지만, 자신을 알지 못하고는 결코 발전할 수 없다. 자신과 주변을 비교해서 위기의식을 갖는 것이 성공의 첫 걸음이다."

고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생전 유일하게 저술한 책 '이건희 에세이'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고인의 삶과 경영철학은 삼성이 국내 1위를 넘어 글로벌 거인으로 성장하는 과정과 고스란히 포개진다.

세계 유수의 기업과 삼성을 직접 비교하고, 그들보다 더 나은 제품을 생산하고 한 발 더 나아가 혁신하는 도전이 바로 경영철학의 골수였다.

이제는 모두가 기억하는 1993년 프랑크푸르트 신경영 선언에서 그는 "마누라·자식 빼고 다 바꾸라"는 지시를 내놓는다.

일본 교세라에서 직접 영입한 일본인 고문 후쿠다 타미오가 작성한 '후쿠다 보고서'를 독일행 비행기에서 읽고, 세탁기 뚜껑 부품이 맞지 않자 제품 제작 직원들이 부품을 깎아 조립하는 몰래 촬영 비디오를 본 직후였다.

"삼성전자 직원 3만명이 만든 물건을 6천명이 고치러 다닌다"며 "암으로 치면 2기"라고 주변을 꾸짖기도 한 그는 1995년 삼성전자 구미 사업장에서 그 유명한 '전화기 화형식'을 거행했다. 시가 500억원 어치의 휴대전화를 불태운 그는 삼성 모든 직원에게 '초일류 기업'이 돼야 한다는 인식을 심어줬다.

1993년 용인 기흥에 구축한 D램 양산라인은 삼성이 한 단계 더 도약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공정이 복잡한 8인치 웨이퍼 기반 D램은 어느 기업도 선뜻 생산에 나서지 못했던 상황이었지만, 과감한 결단으로 이듬해부터는 조 단위 영업이익을 내게 됐다.

이처럼 강력한 오너십·리더십을 바탕으로 과감한 투자를 펼치고, '숨겨진 1인치'를 찾는 꼼꼼함은 세계 일류 기업 삼성을 일궈낸 이건희 경영의 본질이었다.

이건희 회장 시절 삼성은 '삼성타운'이라 불리는 수원을 넘어 경기도 용인·화성·평택으로 사업 거점을 확장했다. 현재 평택 고덕국제화계획지구 산업단지엔 삼성의 세계 최대 규모의 반도체 라인이 건설되고 있다.

인천과도 인연이 깊다. 1970년대 설탕, 조미료 사업을 본격화하던 삼성(제일제당)은 인천항에 1·2공장을 준공하며 제당 분야 사업 다각화의 틀을 마련했다. 이 회장은 2005년 들어 '창조 경영'을 내세우면서 신사업 개척을 강조했다.

이후 삼성그룹은 신수종 사업 태스크포스(TF)를 구성해 바이오, 나노, 로봇 등과 같은 미래 먹거리를 발굴하는데 역량을 집중했다.

신수종 사업의 핵심인 바이오 분야 전진 기지가 바로 인천 송도국제도시에 자리 잡고 있다. 인천의 차세대 동력으로 평가받는 국내 최대 바이오 분야 기업인 삼성바이오로직스를 지난 2011년 송도국제도시에 설립해 운영하고 있다. 현재 1·2·3공장이 가동 중에 있으며 2022년까지 4공장을 준공한다는 계획이다.

4공장 완공 시 삼성바이오로직스는 총 4개 공장, 62만ℓ의 생산 능력을 확보하게 된다. 이는 전 세계 바이오의약품 위탁생산(CMO) 기업 중 최대 규모다.

■ 마지막 순간까지 '창조경영' 외친 혁신 경영가

고인은 특유의 통찰력을 바탕으로 한 직설적인 화법으로 대중들의 큰 주목을 받았다.

1995년 베트남 특파원과 간담회를 하는 중 "우리나라의 정치는 4류, 관료와 행정조직은 3류, 기업은 2류"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2000년대 들어서도 "제트기가 음속(1마하)의 두 배로 날려고 하면 엔진의 힘만 두 배로 있다고 되는가. 재료공학부터 기초물리, 모든 재질과 소재가 바뀌어야 초음속으로 날 수 있다"며 재료부터 기술까지 모든 것을 바꿔야 한다는 '마하경영'을 강조했고, "200∼300년 전에는 10만∼20만명이 군주와 왕족을 먹여 살렸지만 21세기는 탁월한 한 명의 천재가 10만∼20만명의 직원을 먹여 살린다"며 인재 경영을 선포하기도 했다.

이 회장은 2008년 '삼성특검'에 기소되면서 경영 일선에서 퇴진한다. 적폐로 지적받은 전략기획실은 해체됐고, 지배구조를 개선하겠다는 경영 쇄신 방안도 발표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에게 경영권을 물려주기 위해 에버랜드 전환사채(CB)와 삼성SDS 신주인수권부사채(BW)를 헐값 발행한 혐의(배임·조세포탈)로 기소됐으나, 2009년 에버랜드 전환사채 관련 혐의에 대해서 무죄를 받고 나머지 유죄가 인정돼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이 확정됐다.

하지만 곧 대통령 특별사면을 받았다.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활동 등 대외 활동을 이어나가야 한다는 명분이었다.

2010년 삼성전자 회장직으로 경영에 복귀한 고인은 여전히 도전과 혁신을 외쳤다. 2013년 10월 신경영 20주년 만찬에서 고인은 "자만하지 말고 위기의식으로 재무장해야 한다. 실패가 두렵지 않은 도전과 혁신, 자율과 창의가 살아 숨 쉬는 창조경영을 완성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고인이 마자막까지 외친 것은 '변화'였다. 끊임없는 변화. 이것이 이건희 시대 삼성이 세계 초일류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비결이었다. 고인은 2014년 신년사에서 "다시 한번 바꿔야 한다. 변화의 주도권을 잡으려면 시장과 기술의 한계를 돌파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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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구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은 "본인이 아버지에게서 기업을 상속받을 때와 마찬가지로 후계하는 과정에서 꼭 선대와 같은 편법을 저질렀다. 글로벌 삼성 이미지에는 부합하지 않는 흔적"이라고 고인의 과를 평가했다.

그러면서도 "창업 세대가 어렵게 만들어 놓은 기업이 2세 경영인에 와서 수없이 망가졌지만, 고 이건희 회장은 오히려 아버지대보다 기업을 더 확장해서 키운 장본인이다. 그를 통해 재벌 세습이 꼭 나쁜 것이 아니고, 전문 경영보다 장점이 많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게 됐다"고 설명했다.

/신지영기자 sjy@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