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암행어사때 만난 총명한 童妓 '가련'
10년후 귀양지 찾아 정성껏 뒷바라지
두사람 사랑은 유배 풀리면서 끝나
또다른 여인은 관서지방 명기 '계월'
황해도 관찰사 마치자 이별詩 남겨

그는 암행어사로 비밀리에 함흥에 이르렀는데 어사가 출두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그는 자신이 거느리고 있는 종자들이 비밀을 누설한 것으로 생각하고 엄하게 꾸짖었으나 모르는 일이라 하여 소문의 진원지를 찾으라 명했다. 얼마 지난 후 7살 된 소녀를 데리고 왔다. 소녀는 눈빛이 초롱초롱하고 입매가 야무졌다. 그는 아이를 보자 어이가 없었다. 아이가 입을 열었다.
"아뢰옵니다. 소녀의 집이 길가에 있는데 창문을 열고 밖을 보니 걸인 두 사람이 길가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중 한 사람은 의복과 신이 다 헤어졌으나 손이 희었습니다. 두 사람은 마치 존비인 것 같았습니다. 손이 흰 사람은 어사인 것 같았고 예를 다해 섬기는 걸인은 종복인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말했더니 소문이 퍼진 것입니다."
이광덕은 감탄하고 이름을 물었다. "가련이라 하는 동기입니다." 그는 너의 총명이 가히 여사가 될만하구나 하고 시 한 수를 적어주었다. '어린아이의 재주가 총명하니 문사라 부를만하고/옥용이 아리따우니 한 떨기 꽃과 같구나./ 아직은 봉오리가 열리지 않았으나/만개하면 관북의 진랑이 되리라.'라는 시였다. 여기서 진랑은 개성의 황진이를 이르는 말이었다. 소녀는 시문을 공손히 받아들면서 죽을 때까지 간직할 것이라고 말하고 "훗날 사또 나으리께서 소녀를 거두어주소서. 소녀는 감히 나으리께 일생을 의탁하겠사옵니다"라고 머리를 조아렸다. 그때 이광덕은 소녀의 말을 웃어넘겼다.
그는 10년이 지나 소론의 탄핵으로 함흥으로 귀양을 갔다. 하루는 밝은 달을 바라보고 있는데 인기척이 들리더니 한 여인이 사립문밖에 나타났다. 그녀가 가련이었다. 가련은 이광덕이 함흥에서 유배 생활하는 동안 정성껏 뒷바라지를 했다. 그는 가련의 빼어난 미모가 아까워 결혼하기를 권했으나 가련은 듣지 않았다. 달 밝은 밤이면 누대에 올라 제갈공명의 공명가와 출사표를 읊는 가련이었다. 그 소리가 요요하고 맑아서 마치 학이 우는 소리 같았다. 두 사람의 사랑은 이광덕의 유배가 풀리면서 끝났다.
또 다른 여인은 관서지방의 명기 계월이다. 그녀와 이광덕이 어떻게 만나게 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어떤 기록에는 황해도 관찰사로 있을 때 그녀를 애첩으로 삼았다고 되어있다. 그곳의 관직을 끝내고 떠나올 때 계월이 지은 시로 보이는 '순상이공을 떠나보내며'에서 그녀는 다음과 같이 깊은 슬픔을 노래한다.
'눈물을 머금은 눈에 눈물을 머금은 이 보이고/애간장 끊어지며 애간장 끊어진 임을 보내네/ 일찍이 책 속에서는 그런 일 예사로 보았거늘/오늘 이 내 몸에 닥칠 줄이야 어찌 알았으리오'.
따지고 보면 기녀에게 만남과 헤어짐이란 일상적인 일이어서 여러 이별을 경험했을 것이다. 유독 이광덕과의 이별이 애간장 끊어지는 것은 그만큼 그를 사랑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순상은 도내를 순찰하는 직책인데 관찰사가 겸임했다. 시제로 보면 이광덕이 황해도 관찰사로 있을 때 두 사람의 관계가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계월의 이별 시는 또 있다. '님을 보내며'가 그것이다. '대동강에서 정인을 보냅니다/버드나무 천 가지로도 묶지 못하는 사람이여/눈물 맺힌 눈이 눈물 맺힌 눈을 봅니다/가슴 아픈 사람이 가슴 아픈 사람과 마주 서서'는 그들의 이별이 얼마나 가슴 아픈 이별인지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시가 이광덕과의 이별을 노래한 것이라는 증거는 없다. 계월은 시문과 춤과 노래와 미모가 빼어난 관서지방의 명기였으니 얼마나 많은 남정들을 만나고 헤어졌을지 짐작할 수 있다. 이광덕과의 이별 노래라면 그들은 이별 여행을 했던 것이 분명하다.
/김윤배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