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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던 길 멈추고 꽃핀다

잊거나 되돌아갈 수 없을 때 / 한 꽃 품어 꽃핀다

내내 꽃피는 꽃차례의 작은 꽃은 빠르고

딱 한 번 꽃피는 높고 큰 꽃은 느리다

헌 꽃을 댕강 떨궈 흔적 지우는 꽃은 앞이고

헌 꽃을 새 꽃인 양 매달고 있는 꽃은 뒤다

나보다 빨리 피는 꽃은 옛날이고

나보다 늦게 피는 꽃은 내일이다

배를 땅에 묻고 아래서 위로 / 움푹한 배처럼 안에서 밖으로

꼬르륵 제 딴의 한소끔 밥꽃을

백기처럼 들어올렸다 내리는 일이란

단지 가깝거나 무겁고 / 다만 짧거나 어둡다

담대한 꽃냄새 /방금 꽃핀 저 꽃 아직 뜨겁다

피는 꽃이다!

이제 피었으니

가던 길 마저 갈 수 있겠다

정끝별(19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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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성훈(문학평론가·경기대 교수)
그 누구도 오늘이라는 하루를 살아 본 사람은 없다. 오늘은 미리 살 수도 나중에 살 수도 없는 날이다. 오늘이 새로운 것처럼 매 순간의 시간은 새롭게 다가오고 지나간다. 이 시간을 꽃이라고 한다면 시간은 언제 어디서나 피어나는 것이다. 이른바 '빨리 피는 시간은 옛날이고 늦게 피는 시간은 내일'이 되는 것으로 '흔적 지우는 시간은 앞이고 헌 시간이'되는 것. 그 시간을 살고 있는 우리는 매 순간 '방금 꽃핀 저 꽃'처럼 아직도 뜨거운 심장을 매달고 있다. 따라서 이 시간은 어제 그토록 살고자 했던 사람들의 피어나지 못하는 시간이 된다. 삶과 죽음은 '백기처럼 들어올렸다 내리는 일' 같아서 오늘 피었다고 해서 내일도 피어ㅌ난다는 보장이 없는 법. 오늘이라는 시간 속에 '담대한 꽃냄새'를 남긴다는 것은, 가령 내일 피지 못한다 해도 향기로 남을 수 있는 것이니.

/권성훈(문학평론가·경기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