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금의 세태에 심경 참담한 것은
선배가 남긴 부끄럼 메시지로부터
모두 너무 멀어졌다는 생각 때문
동주의 시는 염결한 영혼의 노래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서시) 기도할 만큼 욕심 없는 영혼의 시다.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쉽게 씌어진 시)이라며 괴로워하는 깨끗한 영혼의 노래다. 한때는 나도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럴 수 있다고 믿었다. 하나 누항을 떠돌며 세상의 분진을 뒤집어쓰다 보니, 한 점은커녕 손발가락의 합 안쪽으로 부끄럼을 헤아리는 것마저 감지덕지하게 되었다. 어쩌다 수월히 글줄을 쓰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얄팍한 그걸 재능인 양 우쭐하기도 했다. 시나브로 하늘을 우러르는 일마저 잊어갔다.
동주는 스물일곱에 죽었다. 직업을 가져본 이력도, 아내도 자식도 없었다. 어쨌거나 학생 신분으로 밥벌이에서 자유로웠기에 한 점의 부끄럼조차 없는 영혼을 지킬 수 있었던 게다. 시집을 출판하겠노라고 이양하 교수를 찾아갔지만 때가 좋지 않다는 스승의 만류에 뜻을 꺾었으니 이른바 '등단'한 시인도 아니었다. 시인의 허울을 들쓰지 않았기에 부질없는 영광에 붙매여 허명을 쫓는 부끄럼에서 멀었던 게다. 스물일곱이라서 가능한 결백, 스물일곱이 아니라면 감당할 수 없는 순수. 어쩌다 그보다 곱절을 더 살아버린 후배가 구차한 변명과 어설픈 자위로 내놓은 해석이 이리도 남루하다.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 '내로남불'이라는 말이 공공연하게 통용되는 세상이다. 아무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불감의 세태에 그나마 덜 뻔뻔해지려면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야 한다. 최소한의 염치, 부족한 체면이나마 차려 보려면 고민해야 한다. '부끄럼' 속에서 뒹굴다가 마침내 '부끄럼'과의 분별마저 사라져버리는 지경에 이르지 않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부끄럼'을 느낄 줄 알아야 한다. '부끄럼'을 느끼려면 '부끄럼'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그리고 알아낸 것을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한다.
부끄러워야 진실해지고 반성하고
타인 연민하고 세상 이해할수 있어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꿈꾸던 젊음이 몰렴해지는 것은 세월의 문제가 아니다. 단순한 행운이 아니라 마땅히 노력에 의한 성과일지라도 유무형의 재산이 생겨나면서 어느새 누리는 것을 당연시하기 때문이다. 이름과 지위가 인간의 격(格)을 대신하고, 대접받고 접대받는 일들에 익숙해진다.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능수능란한 타협 속에서 모든 일이 자연스러워질 때, '부끄럼'은 더 이상 그곳에 자리하지 못한다. 작금의 세태에 안팎으로 심경이 참담한 것은, 영원히 젊은 선배 작가가 짧은 생애를 바쳐 남기고 간 '부끄럼'의 메시지로부터 불민한 나를 포함 다들 너무 멀어졌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믿어본다. 동주의 시가 찍어놓은 차가운 불도장처럼, 문학의, 예술의 본령은 '부끄럼'을 자각하는 데 있다. 때로 속되고 천하게 타협으로 밥벌이를 하고 눈속임 같은 일상을 꾸릴지라도, 최소한 글을 쓸 때만은 문학 앞에서 한없이 낮아질 수밖에 없다. 부끄러워야 진실해진다. 부끄러워야 반성을 한다. 부끄러워야 타인을 연민하고 세상을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야 역설적으로 발가벗은 영혼을 글이라는 형태로 내놓을 때 부끄럽지 않고 당당할 수 있다. 그것이 이 경조부박한 시대에 문학이, 그리고 작가라는 사양 산업 종사자들이 존재해야 할 마지막 이유이자 의미일지도 모른다.
/김별아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