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군은 지난해 4월22일 학비를 벌기 위해 아버지 일터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지만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작업에 갑작스레 투입됐다가 300㎏ 철판에 깔려 숨졌다. (2021년 5월 7일 인터넷 보도=평택항서 작업중 철판깔려 숨진 청년…아버지 "안전관리 허술" 오열)
그렇게 1년 가까이 이 군의 죽음에 대한 진상 규명을 촉구해왔던 유족은 "판결에 아쉬움이 남는다"며 "피고인 모두가 형을 유예받은 것은 억울한 일"이라고 호소했다. 이번주 취재 후(後)는 이 사건 선고 공판 당시 현장 분위기를 전한다.
그러던 중 이씨 눈빛이 차갑게 돌변했다. 취재진 틈에 있던 이씨는 홱 돌아서서 누군가를 향해 잰걸음을 했다. 이씨가 마주한 이는 이 사건 피고인 A씨. A씨는 이씨의 손가락질에도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았다. 법정 앞이 소란스럽자 법원 직원이 이들을 제재하는 등 한때 혼란스러운 상황까지 연출됐다.
판결 선고는 예정된 시각보다 20분 가량 늦은 오후 1시50분께 시작됐다. 양손을 꼭 모은 채 증인석에 앉아 있던 4명의 피고인도 엉거주춤 피고인석으로 옮겨갔다. 긴장한 듯 허리를 꼿꼿이 세운 이들은 재판 내내 바닥을 응시했다.
사업자와 경영 책임자를 형사 처벌해야 산재 사망을 줄일 수 있다
이씨는 허탈함에 짧은 탄식을 내뱉었다. 선고 직후 피고인들은 도망치듯 법정을 빠져나갔다. 이들과 달리 이씨는 '할 말이 많다'는 듯 기자회견을 자청했다.
수원지법 평택지원 법정동 앞에 선 그는 줄곧 억울함을 호소했다. 이씨는 눈물을 꾹 참으려는 듯 보였다. "검찰 구형에서 이미 예상했던 결과지만 역시 이 피해자의 슬픔, 아픈 마음을 다 헤아리지 못하고 있구나. 두 번 다시 이 땅에 저와 같은 아픔을 가지고 살아가야 할 그런 분들이 안 계셨으면 하는 게 간절한 소망입니다"
'고 이선호 산재사망사고 대책위원회'(이하 대책위)도 아쉬움을 토로했다. 대책위는 입장문을 통해 "솜방망이 처벌로 산재 사망 사고에는 턱없이 가벼운 처벌"이라며 "꼬리 자르기 식으로 현장 노동자만 처벌하지 말고 사업자와 경영 책임자를 형사 처벌해야 산재 사망을 줄일 수 있다"고 강조했다.
법원은 왜 피고인들의 형 집행을 유예했을까. 이번 사건 판결문을 들여다봤다.
수원지법 평택지원 형사1단독 정현석 판사는 이처럼 판시했다. "피해자의 안전을 위한 의무를 다하지 않은 피고인들의 잘못들이 경합해 피해자가 사망하는 돌이킬 수 없는 황망한 결과가 초래됐다. 피고인들의 죄책이 가볍지 않다." 노동자의 안전을 위한 조처를 게을리 한 피고인들의 행위와 이 군의 사망 간 인과관계를 인정한 셈이다.
다만, 여러 감형 요소가 양형에 영향을 미쳤다. 법원 판단의 요지는 '사망 예견 가능성' '합의 여부' 등이었다.
먼저 사망 예견 가능성이 언급됐다. "(문제가 된) 컨테이너는 제작한 뒤 한 번도 정기점검조차 받지 않은 것으로 보이고 (중략) 피고인들의 결과 발생 예견 가능성 및 회피 가능성에 있어 어느 정도 참작돼야 할 것으로 보인다. 안전 기준에 의하면 컨테이터는 제작 후 5년 이내에 정기 점검을 받아야 하고 그 후에도 30개월을 초과하지 않는 기간 내 계속 점검을 받도록 돼 있으나 이 사건 컨테이너는 중국에서 제작 승인됐고 소유자도 중국 법인이어서 국내 선박안전법에 따른 지도 감독 등이 가능하지 않다."
유사 사건 양형 등을 고려했다
한 마디로 노후화된 컨테이너의 자체 안전장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서 예상치 못한 사망 사고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이 군이 깔려 숨진 컨테이너는 1세대 FR 컨테이너로 2002년 7월 제작됐다. 최근에는 4세대 컨테이너가 유통된다.
또 다른 감형 요소는 유족과의 합의였다. 판결문에는 이례적으로 합의금 액수까지 명시됐다.
끝으로 정 판사는 '중대재해 처벌 등에 관한 법률' 시행 전이라는 점도 강조했다. 정 판사는 지난 13일 선고 공판 당시에도 "이 사건은 생명과 안전의 가치를 소홀히 한 사회 전반의 안전불감증에 대해 높은 주의 의무를 부과하고 이를 위반할 경우 사업주 등에게 책임을 물어 (중략) 사고를 방지하려는 '중대재해법' 시행 전에 발생한 것으로 유사 사건 양형 등을 고려했다"고 판시했다.
한편, 중대재해법은 오는 27일 시행을 앞뒀다. 해당 법에 따르면 노동자가 사망하면 안전 조치 의무를 소홀히 한 사업주나 경영 책임자에게 1년 이상 징역 또는 10억 원 이하 벌금형을 선고한다. 법인이나 기관도 50억 원 이하의 벌금형을 받는다. 반면 산업안전보건법을 적용하면 사업주가 제대로 된 안전 조치를 하지 않아 노동자가 사망하더라도 권고 형량은 징역 1년~2년6개월이다. 이 경우 형량이 3년 이하여서 집행 유예가 가능하다.
/이시은기자 see@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