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네가 진정 아비를 사랑한 적이 있다면 이 흉악하고 무도한 살인의 원수를 갚아다오.” 덴마크 왕자 햄릿의 운명은 아버지인 선왕의 유령을 만나면서 완전히 헝클어진다. 햄릿의 인간적 고뇌는 찬란한데, 복수는 광기 어린 좌충우돌의 연속이다. 눈 멀고 독 바른 칼날로 연인 오필리어 가족을 파멸시키고, 부정한 왕비인 어머니가 독배를 들고, 원수인 숙부를 살해하지만 본인도 죽는다. 왕가가 자멸한 덴마크는 노르웨이 왕자가 차지한다. 복수심에 부유하던 유령의 한 맺힌 유언에서 비롯된 파국이다.
당원이 선출한 김문수 대선 후보를 한덕수 예비후보로 바꾸려던 국민의힘 지도부의 10일 하루 후보 교체 소동이 무산됐다. 당무 전권을 위임받은 김 후보에 대한 당 지도부의 24시간 정치 쿠데타를 당원들이 투표로 막았다. 민주주의 정당사에 전대미문의 사건이다. 권영세 비대위원장과 권성동 원내대표가 주도했다. 정치 9단엔 부족하지만 정당 민주주의의 본령에 충실했던 중진들이다. 무엇에 홀려 이런 짓을 벌였나?
윤석열 전 대통령이 11일 페이스북에 글을 올렸다. “대한민국은 선택의 갈림길에 서 있다”며 “자유와 법치의 길을 지켜낼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무책임한 선동과 무질서에 국가의 명운을 내어줄 것인가라는 질문 앞에서 결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 전 총리에게 ‘자유민주주의와 번영을 위한 사명’을 김 후보와 함께 이어가 줄 것을 당부했다. “단 한 번도 당을 원망한 적이 없다”며 “이번 선거에서 반드시 승리해야 하며 승리할 수 있다”고 지지층의 단결을 호소했다.
탄핵으로 파면당한 전직 대통령의 호소가 ‘햄릿’의 유령의 호소와 닮았다. 정치생명을 잃은 전직 대통령의 절절한 호소와 국민의힘 지도부의 24시간 후보 교체 대소동. 시간의 선후는 어긋나는데 맥락에선 상통하는 듯한 느낌이다. 스스로 임기를 중단시킨 전직 대통령의 절치부심이 대국민 호소에 가득하다. 윤 전 대통령이 국민의힘 울타리를 배회한다.
죽은 공명이 산 중달을 물리친 적이 있다. 하지만 죽은 공명의 승리는 오장원 전투 한 번뿐이었다. 천하는 결국 살아있는 사마의 손에 떨어졌다. 죽은 정치가 산 정치를 이길 수 없다. 비상계엄의 그날 파문당한 윤 전 대통령의 대국민 호소는 정치 유령의 독백에 가깝다. 국민의힘은 죽은 공명을 잊고 초야에 은거한 수많은 제갈공명들을 삼고초려해야 한다.
/윤인수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