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일 별세해 한국문학계 큰 슬픔 안겨
안산 거주 시절 놀라운 소설로 독자들 위로
‘자멸파’ 건강 돌보지 않아 오랜 투병 생활
인천 섬·포구·제물포구락부 등 깊은 인연

윤후명 소설가가 지난 8일 저녁에 별세하셨다. 얼마 전에 부산에서 열린 ‘윤후명 문학 그림전’ 개막식에도 참석했다고 알고 있었는데 이리 쉬이 가실 줄 몰라 황망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다. 한국문학의 독보적인 소설가이자 시인이 하늘의 별이 된 것이다.
‘그러나 그때의 그 협궤열차만큼 내 인생에 환상으로 달린 열차는 없었다. 가을에 그 작고 낡은 기차는 어차피 노을녘의 시간대를 달리게 되어 있었다. 서해안의 노을은 어두운 보랏빛으로 오래 물들어 있고, 나문재의 선홍색 빛깔이 황량한 갯가를 뒤덮고 있다’.
마음이 황량한 갯가의 선홍빛 나문재 같았다.
소설가를 꿈꾸며 윤후명 소설가의 ‘협궤열차’를 읽었을 때의 느낌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책을 덮을 때쯤, 한때 살았던 집 뒤의 협궤열차 철길과 추운 겨울, 집 앞 바닷가로 떠밀려와 죽은 은빛 물고기 떼가 떠올랐다. 금방이라도 숨을 쉴 것 같은 싱싱하고 차가운 죽음이었다. 그건 지독한 외로움이자 상징처럼 보였다. 시이자 소설이었다. 선생님의 소설이 그랬다.
인천과 수원을 달리던 조그맣고 뒤뚱거리는 협궤열차. 경기도 안산 예술인아파트에 살던 ‘질풍노도’의 시기에 선생님은 ‘자기 삶의 절대고독 속에서’ 협궤열차라는 놀라운 소설을 내놓아 독자를 위로했다. 안산시 승격 30주년을 맞아 협궤열차 사진전을 열면서 윤후명 작가를 초청했을 때는 안산시장에게 근사한 명아주 지팡이를 선물 받았다고 좋아하시기도 했다.
윤후명 소설가는 한국문학에서 누구도 흉내 내지 못할 ‘독보적 스타일리스트’였다. 소설의 주인공은 늘 작가와 다름없는 1인칭 화자였고, 이야기하되 이야기하지 않는 방식으로 서사를 해체하다시피 했으며, 소설에 파격적으로 시를 넣어 시와 소설의 경계를 허물어나가기도 했다.
윤후명 소설가와 소설 화두는 늘 사랑이었다. 외로움과 그리움을 환상적으로 빚어 사랑을 얘기하기도 했고, 불교의 염원처럼도, 먼 서역만리의 돈황이나 강릉의 처녀호랑이의 머리로 얘기하기도 했다. 구체적인 서술과 묘사가 환상적 이미지와 어울려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낯선 세계로 독자를 데려다 놓기도 했다.
‘한번 간 사랑은 그것으로 완성된 것이다. 애틋함이나 그리움은 저세상에 가는 날까지 가슴에 묻어두어야 한다. 헤어진 사람을 다시 만나고 싶거들랑 자기 혼자만의 풍경 속으로 가라. 그 풍경 속에 설정되어 있는 그 사람의 그림자와 홀로 만나라. 진실로 그 과거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자신은 그 풍경 속의 가장 쓸쓸한 곳에 가 있을 필요가 있다’.
협궤열차를 쓰기 이전이나 이후에도 선생님은 술을 한 번 마시기 시작하면 쉬지 않고 며칠을 마셨다. 스스로를 ‘자멸파’로 불렀고, 몸을 돌보지 않고 끝까지 가장 쓸쓸한 곳으로 진실을 향해 밀어붙였다. 그리고 총량을 다 마신 듯 몸이 더 이상 허용하지 않을 때 미련 없이 술을 끊었다. 그러나 이미 몸이 상한 뒤였고, 오랜 시간 간경화로 투병해야 했다.
선생님은 인천의 섬을, 포구를, 제물포구락부를 좋아해 소설에 등장시키기도 했다. 어느 날은 전화를 걸어 인천의 소설 동인인 ‘소주한병’ 소설가를 위해 시 ‘일곱 명의 여작가’를 지었다고 읽어주기도 했다. 새얼백일장 심사위원으로 오셨을 때는 늘 수원밴댕이집에서 김윤식 시인을 비롯해 몇몇 작가와 어울리는 연간 행사를 기쁘게 즐기기도 했다. 그럴 땐 소년 같이 순수한 얼굴이었다. 이제 그 모습을 다시는 뵙지 못하게 되었다. 하고 싶은 말은 목구멍으로 치받아 올라오는데 마지막 길에 선생님의 시 ‘사랑의 길’을 놓아드릴 수밖에 없는 마음 애통하다. 부디 영면하시길.
‘먼 길을 가야만 한다 / 말하자면 어젯밤에도 / 은하수를 건너온 것이다 / 갈 길은 늘 아득하다 / 몸에 별똥별을 맞으며 우주를 건너야 한다 / 그게 사랑이다 / 언젠가 사라질 때까지 / 그게 사랑이다’.
/양진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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