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자는 반드시 인리(仁里)를 택하여 거(居)한다는데 인천은 이와 반대로 연애소설이나 유행잡가 한 권 사 볼 만한 책사(冊肆) 한 곳이 없고, 돈이라면 목숨을 내기하여 옥이야 금이야 하던 제 자식까지 왜유통(倭油桶)에 오줌을 싸게 하는 수전노, 이 골목 저 골목 백주대로에서 산 사람의 눈깔이라도 뽑아 먹을 수만 있으면 덤벼 보려고 껄떡껄떡하는 고리대금 아귀쟁이들의 발호하는 꼴을 보고는 참말 대학목약(大學目藥)을 찾기에 겨를이 없을 모양이다.”

100년 전 잡지 ‘개벽’ 제50호(1924년 8월)에 실린 ‘인천아 너는 어떠한 도시?’라는 제목의 기사 중 한 대목이다. 돈이라면 자식도 팔아먹는 수전노와 고리대금업자들이 판을 치는 인천의 모습을 차마 눈 뜨고는 볼 수 없다는 얘기다. 대학목약은 유명한 안약이었다. 당시 인천은 일본인들이 만든 경제도시라는 이름의 수탈기지였다.

돈에 물든 인천을 이보다 더 신랄하게 비판한 글이 또 있었던가 싶다. 미두(米斗) 사업의 본거지였던 그 시절 인천은 일확천금을 노리는 한탕주의자들이 몰려들어 전 재산을 날리고, 온 집안이 파산하는 폐해가 넘쳐났다. 그 중심에 고리대금업자들이 있었다.

이 기사에 나오는 ‘군자가 거처로 택한다는 인리(仁里)’는 요즘 말로 하면 ‘인문도시’로 해석할 수 있다. 돈보다는 사람을 중시하는, ‘문화보국(文化保國)’의 그 문화가 넘실대는 그런 도시 말이다. 그러나 인천(仁川)이라는 도시는 그 이름처럼 ‘인리’여야 하겠는데, 실제로는 그렇지를 못하고 돈에 눈이 먼 사람뿐이어서 도저히 군자가 거처할 곳이 못 된다는 지적이다.

100년이 흐른 지금의 인천은 과연 어떠한 도시일까. 내가 버린 쓰레기도 내 동네에서 처리해서는 안 되고, 새로 짓는 다리 이름은 저쪽이 아니라 이쪽 이름이어야 하고, 지하철 같은 편리함은 우리 집 앞이 먼저인 그런 도시는 아닌가. 언제부터인가 인천에서는 모든 걸 집값 올리기에 맞추어 열을 내는 풍조가 거세다. 다른 곳도 마찬가지겠지만 신도시가 많은 인천은 유난히 두드러진다. 행정기관이 일을 할 수 없을 정도다. 이런 인천에 ‘인문도시연구소’가 어제 문을 열었다. 인문도시연구소가 인천에 새로운 문화의 등불을 밝혀주기를 희망한다. 그리하여 인천도 군자가 거처할 만한 곳이라는 평판을 듣게 되기를 바란다.

/정진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