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 애착’ 공동체사회 꿈꾼 지식인
혁명은 흘러간 시대 이미지로 남아
싸울 수 있는 ‘혜안·용기 상실’ 성찰
12·3 역사적 과정 등 의미 되새기고
고통받는 민중 진정한 혁명 있어야

지금은 잘 쓰지 않는 말이 되었지만, 내가 대학 다닐 때는 이 말이 어디서든 들렸다. ‘인텔리겐치아’(intelligentsia)’. 학민글밭이라는 출판사는 1983년에 ‘인텔리겐챠와 지식인’을 펴내기도 했다. 이처럼 ‘인텔리겐치아’라는 말에는 그냥 ‘지식인’이라 할 때와 달리, 어떤 숭고하고도 신비로운 이미지가 덧붙여져 있었다.
인텔리겐치아는 1830년대의 러시아에서 처음 사용하기 시작했다. 나는 1984년에 대학에 들어갔는데 그때는 ‘러시아 인텔리겐치아’라고 두 단어를 꼭 붙여서 말하곤 했다. 그때는 또 ‘러시아 나로드니키’에 대한 숭배열이 있었다. 그들은 러시아의 농민들, 곧 귀족 영지에 붙어사는 ‘농노’들에 대해 깊은 애착을 품고 이들에 기초한 공동체 사회를 꿈꾸며 싸웠다.
이처럼 인텔리겐치아는 ‘민중들’, ‘인민들’에 대한 뜨거운 애착과 동정을 품고 이를 실제로 실천할 수 있는 지식인들을 가리켰다. ‘우리’는 그냥 단순히 ‘지식 기술자’가 되려 해서는 안 되었다. 민중들, 인민들을 위한 지식을 축적하고 또 이를 실천으로 옮길 수 있는 사람들이어야 했다. 그래야 ‘진정한 지식인’이라 불릴 수 있었다. 그 시절에는 대학마다 방학이면 ‘농활’을 떠나곤 했다. 학생들은 이를 민중들에 대한 사랑의 실천을 배우는 현장으로 소중히 여겼다.
또 이 인텔리겐치아라는 말에는 지식인이라면 응당 ‘혁명’을 지향해야 한다는 뉘앙스가 담겼다. ‘무엇을 할 것인가’를 쓴 니콜라이 체르니셰프스키(1828.7.24~1889.10.29)는 예술이란 ‘삶의 교과서’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의 소설의 주인공 ‘라흐메토프’는 삶을 혁명에 바쳤다. 체르니셰프스키 자신도 생애 후반부 대부분을 징역형과 시베리아 유형에 바쳤다.
이것이 흘러간 시대의 지식인 이미지였다. 러시아 인텔리겐치아들은 황제 ‘차르’ 밑에서 신음하는 러시아 ‘인민’들을 위해 처절하게 투쟁하며 스러졌다. 우리 사회의 지식인들도 ‘5·18 학살’을 자행한 군사독재에 맞서 죽음을 불사한 투쟁을 벌일 수 있어야 했다.
러시아 인텔리겐치아의 이상에는 전혀 미치지 못한다. 그러나 그 시대 이후 나의 ‘지식인 상(像)’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아마도 그러한 ‘이상적 실천가’의 그것이다.
그 시대에는 금방 논에서 모내기를 하다 나온 것 같은 학생들이, 특히 ‘철학과’와 ‘국사학과’ 같은 학과에 많았다. 그만큼 ‘가난’은 ‘나’의 바로 옆에 하나의 실체로서 존재했다. 이 가난을 ‘가져온’ 것으로 간주된 사회적 부조리 또한 ‘군사독재’의 형태로 ‘나’의 눈앞에 뚜렷한 실체로서 군림했다.
세월이 많이도 흘렀다. 그 사이에 ‘절대적’ 가난은 대체로 ‘상대적’ 가난과 그에 따른 ‘결핍감’으로 대체되었다. 각자의 눈앞에 가시적인 형태로 존재하던 ‘폭력적인’ 국가의 형상은 점차 희석화되었다. 나는 이따금씩 내가 속한 세대가 이 시간의 경과 속에서 점차 타락해 버린 것은 아닌가 생각한다. 또한 그러면서 현실을 날카롭게, 그리고 근본적으로 살펴 당면한 시대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파악하고,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희생적으로 실천하고 ‘싸울 수 있는’ 혜안과 용기마저 상실해 버린 것은 아닌가 생각할 때가 많다.
그러나 문제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지난해 12월3일에 시작된 일련의 역사적 과정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지식인이라면, 그리고 문학인이라면 자신이 혹시 색안경을 끼고 있는 것은 아닌지 성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혁명’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 여섯 달에 무슨 이름을 붙여준 것 같다. 그러나 이제야말로 진정한 혁명이 있어야 한다. 민중들을 위한, 국민을 위한 혁명이 고조되어야 한다. 삶이 절망과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다.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님의 침묵’) 시는 염원의 표현이다. 이 순간, 만해 시인의 시구절이 생각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방민호 문학평론가·서울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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