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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방민호 칼럼] 서울 답사 하루

    [방민호 칼럼] 서울 답사 하루 지면기사

    춘원연구학회 답사는 9월에 있어야 할 것을 한 달 이상 미루어졌다. 다시 무산되지 않도록 답사코스를 정비하고 대학원생들에게도 일찍부터 참여를 부탁했다. 무엇보다 우등버스를 빌려 답사가 덜 피로하도록 했다. 연로하신 선생님들까지 스물여섯 사람가량 5호선 광화문역 앞에 모였다. 공사 중인지 출입구는 막혀 있다. 동화면세점 앞에서는 시국을 성토하는 대회가 열리고 있다. 그럭저럭 다 모이자 곧 향한 곳은 바로 앞 옛 ‘동아일보’ 사옥. 늘 지나치기만 하던 곳이다. 일요일이어선지 일민미술관은 문을 닫았고 신문박물관 쪽만을 돌아본다. ‘황성신

  • [방민호 칼럼] ‘변혁적 중도주의’ 진단

    [방민호 칼럼] ‘변혁적 중도주의’ 진단 지면기사

    ‘중도’에 관하여 대개는 ‘좌’와 ‘우’의 어느 절충·타협 지점에 서는 것이라 생각하곤 한다. ‘중도좌파’다, ‘중도우파’다, 하는 말들은 그런 발상법에서 온 것이다. 이러한 ‘중도’의 쓰임새는 그것대로 유효한 면이 없지 않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를 보다 깊이 살펴보기 위해서는 이러한 용법을 새로 보아야 한다고 생각된다. 이 ‘중도’에 관해서는 유교 경전 말고 불교에 더 깊은 유래가 있다. 이 ‘중도’란 석가족의 성인 석가모니, 붓다께서 말씀하신 것이다. 이 고타마 싯다르타가 왕가를 떠나 고행하며 금강석같이

  • [방민호 칼럼] 어떤 폭력의 기억

    [방민호 칼럼] 어떤 폭력의 기억 지면기사

    옛날에 서교동 경남예식장 뒤편의 뒤편 작은 골목에 살 때다. 합정역 로터리에서 동교동 로터리로 이어지는 직선대로는 늘 사람들로 붐비지만, 그 뒤편 골목 거리는 인적이 드문 곳도 있다. 밤 열 시나 되었을까? 그때, 골목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가로등도 드문드문 어둡고 인적도 드물었지만 사람들이 아예 없지는 않았다. 평소에 불안을 느끼게 할 만한 곳은 아니었다. 저쪽 편에서 두 남자가 걸어오고 있었다. 사내 둘이 거리를 걷는 일은 결코 이상하지 않다. 두 사람이 가까워지자 내 시선은 무심결에 그네들을 향했다. 그때다. 갑자

  • [방민호 칼럼] 세계체제를 다시 생각한다

    [방민호 칼럼] 세계체제를 다시 생각한다 지면기사

    지금 한국은 ‘고요하다’. 무서운 세계정세의 소용돌이 속에 놓여 있는 나라답지 않다. 산채에 들어앉은 것 같이 ‘고요한’ 가운데 세상은 무섭게 변하고 있다. 나라가 시시각각 변모하고 있다. 당장 가까이는 퇴직연금공단이 생긴다던가. 지금까지는 월급 받는 직장인들이 퇴직하면 한꺼번에 큰돈을 받을 수도 있었다. 이제는 그것을 나라가 대신 관리해 준다고 한다. 잘게 쪼개서 달마다 받게 한다는 것이다. 노동경찰이라는 것도 생긴다고 한다. 근로감독관을 그렇게 변화시킨다는 것인데, ‘감독’이 ‘경찰’로 바뀐다 하니 어딘지 모르게 말이 무섭다.

  • [방민호 칼럼] 다시 ‘러시아 인텔리겐치아’의 꿈을

    [방민호 칼럼] 다시 ‘러시아 인텔리겐치아’의 꿈을 지면기사

    지금은 잘 쓰지 않는 말이 되었지만, 내가 대학 다닐 때는 이 말이 어디서든 들렸다. ‘인텔리겐치아’(intelligentsia)’. 학민글밭이라는 출판사는 1983년에 ‘인텔리겐챠와 지식인’을 펴내기도 했다. 이처럼 ‘인텔리겐치아’라는 말에는 그냥 ‘지식인’이라 할 때와 달리, 어떤 숭고하고도 신비로운 이미지가 덧붙여져 있었다. 인텔리겐치아는 1830년대의 러시아에서 처음 사용하기 시작했다. 나는 1984년에 대학에 들어갔는데 그때는 ‘러시아 인텔리겐치아’라고 두 단어를 꼭 붙여서 말하곤 했다. 그때는 또 ‘러시아 나로드니키’에

  • [방민호 칼럼] ‘웃음의 이해’ 시간

    [방민호 칼럼] ‘웃음의 이해’ 시간 지면기사

    ‘울며 겨자 먹기’로 떠맡게된 수업 철학자 탐구하다 ‘소크라테스’까지 청년 타락이란 죄목으로 유죄 판결 ‘입증된 바 없다’며 스스로 택한 죽음 삶의 아이러니는 ‘쓴 웃음’의 미학 그 금요일은 수업이 두 개나 있는 날이었다. 날이 갈수록 수업이 어렵게 느껴지기 때문에 전날부터 준비에 공을 들여야 했다. 세월이 베풀어 준 가르침일 수도 있다. ‘웃음의 이해’는 제목은 아주 유쾌해 보이지만 수업을 끌어가는 사람 입장에서 결코 즐겁게 웃을 수가 없다. 도대체 웃음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웃음은 ‘실행적’으로 웃는 것이 이해하는 것보다

  • [방민호 칼럼] 가짜뉴스 세상

    [방민호 칼럼] 가짜뉴스 세상 지면기사

    요즘 카톡에 판치는 황당무계 뉴스 누가 만들어냈는지 엉뚱하지만 솔깃 아무것도 믿고 싶지 않고 사라져야 막지 않으면 민주주의 지킬 수 없어 거짓 뉴스 실어나르지 않겠다 맹세 듣자 하니, 요즘 카톡에 가짜뉴스가 판을 친다고 한다. 대통령이 일으킨 내란을 지지하고 지난해 4월15일 총선에 부정선거가 있었다는 황당무계한 뉴스를 퍼 나르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이를 막지 않으면 진정한 자유민주주의도 지켜낼 수 없으니, 카톡에라도 이런 가짜 정보를 실어나르는 사람들은 처벌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필자같이 가짜뉴스에 약한 사람도 드

  • [방민호 칼럼] 탄핵 가결 날

    [방민호 칼럼] 탄핵 가결 날 지면기사

    광란의 바람속 가짜뉴스 파고들어 여의도 떠나… 광화문은 인산인해 표결결과 군중 바람과 달라 ‘침묵’ 대통령 괴롭히던 與대표체제 물러나 망명자 심정으로 허둥지둥 여권 찾아 어떤 날은 참으로 긴 하루인 때가 있다. 새벽 눈을 뜨면서 먼저 생각난 것은 김윤식 선생님 사모님께 전화를 드리는 것. 전날 규장각 한국학 연구소에서 ‘김윤식의 카프 연구’를 주제로 발표를 했다. 발표는 이런 얘기로 시작했다. 강의실에서 선생은 막스 베버의 저작 ‘직업으로서의 학문’을 자주 거론하셨다. 예술 작품은 극복이라는 게 불가능하다. 그러나 학문은 뒤에 오는

  • [방민호 칼럼] 포항의 문학인 한흑구의 한 삶

    [방민호 칼럼] 포항의 문학인 한흑구의 한 삶 지면기사

    일제강점기 미국서 영문·신문학 공부 美 군정청 통역관하다 포항으로 떠나 출세·성공 버리고 평화로운 삶 선택 산문시처럼 시적인 구성을 가졌던 그의 수필 그토록 아름다웠던 이유 아침 일찍 포항으로 가는 KTX에 올랐다. 오랜만이었다. 경북매일신문이 버티고 있고, 포항 사람 이대환 작가가 오래 살아온 곳이었다. 바로 며칠 전 포스코 공장에 불이 났다고 해서 놀란 가슴을 쓸어내린 것은, 그곳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알기 때문이었다. 포항 아니라 이 나라에서 포항의 그 공장은 무시될 수 없다. 이번의 포항행은 한흑구라는 문학인 때문이었다.

  • [방민호 칼럼] 한강 문학 세 개의 '원천'

    [방민호 칼럼] 한강 문학 세 개의 '원천' 지면기사

    김유정의 문학과 러 크로포트킨 이상의 '날개'·이효석의 자연주의 '채식주의자' 사상·인물 연상케 해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한국문학 오랜 전통에 맺혀 핀 꽃한국문학의 원천을 한국문학 안에서만 찾는 것 좋지 않다. 우리는 우리의 ‘내부’라는 관념에 사로잡힐 필요 없다. 그런데 이런 때,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가 되었을 때, 한번 우리에게 무엇이 있었는지 찾아보는 것도 나쁜 일만은 아니리라.이번주에는 강원도 춘천 김유정 고향 실레 마을을 간다. 주제가 김유정 문학과 크로포트킨. 그는 러시아 짜리즘 시대와 10월 혁명 이후를 살다간 혁명가요, 또한 생물학자이기도 했다. 십년 전 김유정 학회에서 발표를 할 때, 이 크로포트킨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었다. 김유정 친구 작가 안회남은, 김유정이, 인류의 역사는 김유정식 짝사랑의 투쟁의 기록이라고 생각했다고 믿었다. 하지만 ‘동백꽃’과 ‘봄봄’의 작가 김유정은 다윈과 맬서스 대신에, 그리고 마르크스와 크로포트킨의 사상이 중요해질 거라 했다. 김유정은 투쟁보다는 사랑을 중시하는, 그러니까 크로포트킨주의자였다. 그는 경쟁보다 연대가, ‘mutual aid’가, 생명체 진화에 관건이라고 믿었다. 한강의 ‘채식주의’와 ‘육식성’의 대비법은 어딘지 모르게 ‘크로포트킨적’이다. 김유정의 시대처럼 우리 시대는 여전히 ‘생존경쟁’을 과도 숭배하는 다위니즘의 신봉자들이 자신이 옳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한강의 ‘채식주의’는 다위니즘에 대한 현대판 저항이다.이 ‘채식주의자’ 속 연작의 두번째 단편소설 ‘몽고반점’에 등장하는 채식주의자 영혜의 형부는 미디어 아티스트로 등장한다. 그는 자신의 작품에 날개 달린 것들을 삽입시키고는 하는데, 이는 한강이 작가 이상의 소설 ‘날개’를 반드시 의식하고 참조했음을 의미한다. 작중에서 형부는 어린 아이의 순수를 간직한 영혜와 관능적인 관계를 맺는데, 이것은 분명 상징적 행위다. 형부는 광주 5·18의 상처와 후기자본주의의 문제를 그리는 저항적 예술가의 단계를 넘어, 3층 베란다에서 마치 날개를 가진 존재처럼 날아오르고 싶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