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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방민호 칼럼]이제 일본을 어떻게 볼 것인가?-포스트, 포스트콜로니얼

    [방민호 칼럼]이제 일본을 어떻게 볼 것인가?-포스트, 포스트콜로니얼 지면기사

    '亞 유일 G7' 한국 내려다보던 日코로나19 관련 은폐·축소 드러나美·中·유럽도 내재적 능력 시험대우리보다 우월하다는 생각 뒤집혀한결 성숙한 문명사 인식적용 필요코로나19의 세계적인 유행, 팬데믹 상황이 지속되면서 함께 나타난 가장 특징적인 현상은 각각의 문명권과 국가, 사회들의 '내재적' 능력이 새로운 시험대에 오르게 되었다는 사실일 것이다.미국은 지금 코로나19로 인한 사망자만 십만 명이 넘는 가운데 마흔여섯 살의 흑인 조지 플로이드가 경찰에 의해 목이 졸려 죽은 사태로 인해 전국적인 시위, 폭동에 휘말려 버렸다. 미국이 의료보험이 제대로 작동되지 않는 나라라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져 있었던 터다. 그리고 뭐가 달라도 확실히 달라 보이는 백만장자 대통령에 이번에 나타난 문제들까지 연일 화상에 오르내리고 보면 이것이 우리가 '알고' 있던 미국인가 싶은 생각이 들게 마련이다.유럽은 어떤가 하면 이 나라들 역시 만만찮은 약점을 노출한다. 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 독일, 영국 등 유럽 '공동체'를 이루는 주요 국가들이 보여준 코로나19 대응 양식은 스웨덴의 집단 면역 전략의 허실까지 합쳐져 '선진' 제국들에 대한 인식을 자못 뒤바꾸어 준다고 말할 수 있다. 이들 나라에서는 벌써 많은 사람들이 바이러스에 감염, 희생되었건만, 적절한 방역보다 개인의 자유 운운하는 '한가로운' 주장으로 문명국의 위상을 지탱해 보려는 목소리들이 적지 않게 돌출하곤 한다.한국인들이 가장 놀라웠던 것은 바로 옆 나라 일본일 것이다. 일본은 한국을 35년씩이나 강점했고 패전 이후에도 한국전쟁을 지렛대 삼아 재기에 성공, 오랫동안 아시아에서 유일한 G7 멤버라는 자부심 속에서 한국 사회를 한 단계 아래로 내려다보아 왔다. 한국인들도 일본이 저지른 만행과 악행들에 대해서는 반감을 잃지 않으면서도 그들이 더 발전된 사회라는, 그들이 믿는 '신화'를 '믿어주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도 사실이라면 사실이다. 일제 강점과 한국전쟁 이후 오래 지속되어온 이 인식의 구조를 이번의 코로나19 사태는 단번에 해체시키고

  • [방민호 칼럼]AC(anno covid-19) 원년

    [방민호 칼럼]AC(anno covid-19) 원년 지면기사

    與 총선대승에도 민심이면은 복잡세월호서 시작 '삶의 혁명'과정 이해정부, 경제·정치적 '무능력' 딛고코로나19로부터 국민 생명 지켜내생존이 척도라는 새 세계체제 서막국회의원 선거가 여당 쪽의 압승으로 정리된 모양새다. 물론 이 큰 승리는 표면이 그렇다는 것이다. 진짜 민심의 흐름, 이면의 움직임은 간단치만은 않을 테다. 그러나 복잡한 민심의 사정이 일단 여당의 대승으로 낙착된 데는 만만찮은 사연이 있을 것이다. 도대체 무엇이 세상을 움직이고 굴려가고 있는 것일까? 나는 그 힘을 코로나19의 '혁명적인' 의미에서 찾으려 한다.세월호 참사로부터 코로나19까지. 나는 이것을 '삶의 혁명'의 과정으로 이해한다. 배에 갇힌 아이들의 꽃다운 생명이 국가의 음모, 또는 무능력으로 인해 사태 지듯 스러졌을 때 우리들은 도대체 국가란, 정부란 무엇이냐, 무엇이어야 하느냐를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로부터 지난 정부의 일대 몰락이 시작되었다. 국민의 생명을 저버리는 국가란 어떤 정치적, 경제적 명분을 내세워도 용납될 수 없음을, 세월호 참사로부터 '촛불혁명'까지의 일들은 크게 말해 주었다.정부가 바뀌고 많은 일들이 있었다. 국민의 기대를 저버린 듯한 사건들이 줄을 이은 적도 있었다. 때문에 이번 선거는 정부, 여당에 그렇게 좋지 못하리라고들 했다. 무엇이 이 상황을 바꾸어 놓았던가? 바로 코로나 집단 감염 사태였다. 마치 1980년에 광주가 모든 '정치혁명'의 진원지가 되었듯이 이번에는 대구가 '뜻하지 않게' '삶의 혁명'의 실험 무대로 소환되었다. 대규모 감염, 확진자 급증, 신천지 교회, 의료 체계 붕괴 위기 속에서 정부, 여당은 그렇지 않아도 좋지 않던 비판 여론에 떠밀려 가버릴 듯했다.한 달 '코로나 정국'이 전개되는 사이에 모든 것이 급전되어 버렸다. 중국인들 입국을 금지하지 않아 이 야단이 났다고 야당들이 비난을 가하는 사이에 질병본부와 지자체장들, 그리고 정부는 용케도 확진자의 기하급수적 증가를 막아냈다. 뒤이어 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 미국, 독일…. 급기야 일본으로까지

  • [방민호 칼럼]귀한 분이 세상을 떠나셨다

    [방민호 칼럼]귀한 분이 세상을 떠나셨다 지면기사

    말기암으로 투병중이셨던 선생님세상살이·가는 곳 조차 '까다로운'언제나 올곧은 마지막 '선비' 모습이권·속임수… 허깨비 같은 세상속진실된 삶이란 무엇인지 되돌아봐지난 일요일 슬픈 소식을 전해 들었다. 말기암으로 투병하고 계시던 선생님께서 영면에 드셨다는 것이다. 바로 금요일까지만 해도 아주 평온한 모습이셨다. 통증이 얼마나 있으시냐고 여쭈었을 때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다고 하셨다. 몹시 위중한 중에도 아직 여명이 남아 계시리라 희망을 품을 수 있었다.그러나, 들으니, 그 다음날 몸이 갑자기 안 좋아지셨다고 한다. 호스피스 병동에서 나와 댁으로 가시려던 계획도 실행치 못한 채 그만 유명을 달리하셨다고 했다.코로나19 때문에 호스피스 병동 출입을 엄격히 금한다고, 간호사가 쫓아와 자꾸 독촉하는 바람에 단 2분여 뵌 것이 마지막이었다. 그렇게 허망하고 안타까울 수가 없다.선생님의 말기암 투병기간은 그래도 짧지만은 않으셨던 것 같다. 2018년 8월 말에 당신께 그런 악독한 병종이 자리를 잡은 사실을 뒤늦게 아셨다. 항암투병에서 호스피스 병동에 드시기까지 1년6개월여를 굳세게 삶의 의지를 불태우셨다.낮에 대전에서 소식을 듣고 서울로 올라와 급한 일들을 되는 대로 해치우고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저녁 일곱시가 넘어서였다. 차를 바로 앞 주차장에 세우지 못하고 멀리까지 갔다가 돌아와야 했다. 장례식장에 들어가려 하니 체온 재고 출입기록관리하는 사람이 마스크를 가져왔느냐고 묻는다. 몹시 허둥대는 바람에 차 안에 마스크를 버려두고 뛰듯이 서둘렀던 것이다.이날 따라 바람은 왜 이렇게 맵찬지, 서울 상경 길부터 이십 년래 처음 겪어보는 강풍이었다. 두 번 걸음으로 마스크를 가져오는데 거센 바람이 허술한 옷 속으로 사정없이 밀려들었다. 겨우 마스크를 쓰고 체온을 재고 기록을 남기고 선생님께서 기다리고 계신 빈소로 향했다.흰 국화 한 송이를 바치고 절을 드리는데도 슬픔이고 뭐고 느낄 겨를이 없다가 낮에 소식 전해 주신 분을 뵙자 그때야 눈물이 쏟아지려는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코로나19든 뭐든 선후배들 오신 분들과

  • [방민호 칼럼]인구 문제와 물질주의

    [방민호 칼럼]인구 문제와 물질주의 지면기사

    국가가 신생아 미래 책임 못지고경제는 산모 배려 못해 출산 회피젊은세대들 부모세대 가치관 수용'비혼·독거주의' 실행으로 옮겨삶의 본질에 대한 이해폭 넓혀야중국 우한에서 발원했다는 코로나 바이러스는 무섭기는 무섭다. 하지만 한국의 놀라운 자살률, 인구 감소세에 비추어 보면 그렇게 무서운 것만은 아니다. 프레시안에 실린 한 칼럼은 한국의 출산이 매년 1만 내지 5만씩 감소해 가고 있다고 했다. 이 글을 쓰신 이상이라는 분은 인구 통계를 상세하게 인용했다. 보통 합계 출산율이 2.1은 되어야 인구의 현상 유지가 가능하고, 1.7 이하가 되면 저출산, 1.3 이하가 되면 초저출산이라고 한다. 한국은 이미 1985년부터 저출산 상태였고, 2002년부터는 초저출산 상태가 계속되었다고 한다. 국제통화기금 총재를 지낸 사람이 이 인구 감소 추세를 들어 한국을 '집단자살 사회'라고 했다고도 한다. 어째서 이런 '비극적 현상'이 연출되기에 이른 것일까? 요즘 영화 '남산의 부장들'에 등장하는 대통령 시대에 지도자들은 근대화만이 살길이라고들 외쳤다. 그 근대화는 '수출 백억 불 달성' 같이 물량적인 수치로 측정될 수 있는 것이었다. 급증하는 인구는 이러한 경제적 성장을 위협하는 요소로 간주되었다. '딸아들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는 1970년대의 표어는 근대화와 인구 사이의 부조화 또는 반비례 관계를 압축적으로 가르쳐 주는 표어였다. 물질주의적 근대화 전략은 생명의 탄생을 가난을 불러들이는 '저주'처럼 인식하여 출산을 강력하게 억제하려 했다. 이 물질주의적 근대화 전략은 1970년대 내내 가혹한 노동조건에 대한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노동을 행하는 사람들은 살아있는 생명들인데 이 생명이 근대화라는 예정 지향적인 전략에 의해 억압, 훼손되는 일들이 만연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 물질주의에 대한 저항을 이념적으로 '완성한' 1980년대의 마르크시즘 운동 역시 아이러니하게도 다른 물질주의였다. 물량적 팽창을 추구하는 물질주의적 근대화주의에 계급적 갈등을 중심으로 한 물질주의적 치유 전략이

  • [방민호 칼럼]북한 문제에 관해 생각한다

    [방민호 칼럼]북한 문제에 관해 생각한다 지면기사

    '강대국만 핵을 가질수 있다' 발상美 불평등체제 어떤 도전도 용납못해北 여전히 핵무장 포기 않는 정황자신들 뜻대로 안 움직이는 美 대신'말리는 시누이' 한국에 불만 쏟아내최근 들어 남북관계가 아주 악화된 듯한 인상이다. 지난 두 정부에서 남북관계가 경색되어 있었던 것은 어쩌면 자연스럽게까지 느껴지는 반면, 최근의 남북 관계 악화는 다소 의외라는 느낌을 준다. 곰곰이 따져 보면 그렇게 고개를 갸우뚱거릴 일만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북한과 미국은 지금 핵 문제를 둘러싸고 줄다리기를 하고 있는데, 김정은 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은 겉으로는 서로 사이가 좋은 것 같은 포즈를 취하지만 가슴속 생각은 전혀 다른 것 같다. 미국은 지속적으로 북한의 핵실험을 문제 삼고 있는데, 북한은 어떻게든 완전한 핵무장 해제는 피하려 하고 있다. 미국의 요구는 물론 강대국들만 핵을 가질 수 있다는 식의 '특이한' 발상에서 나온 것이지만 이러한 '불평등' 체제에 대한 어떤 도전도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다. 북한 쪽에서는 핵이야말로 현재 체제의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는 가장 '정확한' 방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미국의 요구를 완전하게 들어줄 생각은 있지 않은 것 같다. 미국을 비롯한 국제적 시선이 집중된 길주 풍계리 같은 곳의 핵시설은 폐기하는 포즈를 취하기는 했지만 다른 곳에서는 여전히 핵무장을 포기하지 않는 듯한 정황을 엿볼 수 있게 한다.과연 북한과 미국의 '대타협'은 이루어질 수 있을까? 극히 불확실해 보이지만 그럴 가능성이 아예 없지만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곤란은 특히 한국 정부 쪽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국 정부는 지난 정부와 달리 남북한 사이의 긴장 완화, 평화 안착을 추진해 왔다. 한국 정부가 북한과 미국 사이를 중재하는 제3자적 위치에 '떨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한반도의 비핵화, 평화 안정이 급선무라고 생각한 것이다. 각종 경제 제재 등 북한에 대한 국제적 압박을 풀어줄 수 있는 실질적 힘은 미국이 쥐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 정부가 먼저 나서서 북한 쪽과 '주체적인' 대화, 교

  • [방민호 칼럼]반드시 밝혀야 할 '세월호' 진실

    [방민호 칼럼]반드시 밝혀야 할 '세월호' 진실 지면기사

    해경청장 헬기로 이동하는 사이배로 옮겨다니다 희생된 학생이야기일부 구조담당자 책임으로 축소 우려중추·하위 권력이 무슨일 벌였는지왜 구하지 않았는지 명백히 밝혀져야 세상이 소용돌이치고 있다. 홍콩에서는 경찰이 시위대를 향해 실탄을 발사해 맞은 사람이 위독상태라고 한다. 시위 중 추락사 한 대학생을 추모하는 행사에 참여한 사람을 향해 또다시 국가적 폭력이 행사된 것이다. 사태가 돌아가는 양상을 보면 중국 정부에서는 의도적으로 '비상사태'를 방치 내지 유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이 들 정도다. 이 홍콩 사태는 당장 1989년 4월에 베이징에서 일어난 천안문 사태를 떠올리게 한다. 당시에 중국 정부는 대학생이 주축을 이룬 시위대를 폭력으로 진압해서 오늘에 이르렀던 것을, 이번에는 중국에 반환된 홍콩에서 새로운 '반복' 조짐이 나타나는 것이다.홍콩 사태에 관해 채널 티브이들은 숨 가쁜 어조로 그 심각성을 전달한다. 그러나 좀처럼 이 사태를 한국의 과거에 오버랩시키는 것은 자제하고 있지만 아는 사람은 알고 느끼는 사람은 느낀다. 경찰이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대를 향해 총을 쏜다는 것, 그것은 1980년에 우리 군부가 광주 시민들을 향해 참혹한 폭력을 행사했던 사실에 직접 연결된다. 헬리콥터에서 기총 소사가 있었다는 최근의 '전언'은 '5·18'이 사십 년 가까운 지금에까지 아직도 진행 중임을 시사한다. 국가 또는 국가의 특정한 중심 세력이 국민, 시민을 향해 살상 무기를 드는 행위는 현대 국가가 결코 문명적으로만 운영되고 있지 않음을 말해준다. 문명이 진보하는 만큼이나 야만도 훨씬 더 큰 규모로 증대하고 있는 것이 이 현대 국가의 커다란 모순 중 하나다. 프랑스 현대비평가 미셸 푸코는 현대 이전에 '국가'는 그 구성원들을 죽게 내버려두거나 살게 하는 반면, 현대 '국가'는 그들을 살게 하거나 죽게 내버려 둔다고 했다. 이를 받아 이탈리아 비평가 조르지오 아감벤은 아우슈비츠 수용소 같은 예증을 들어, 이제 이 현대국가는 '생명 정치'만큼이나 '죽음의 정치'를 행한다고, 이

  • [방민호 칼럼]관전평

    [방민호 칼럼]관전평 지면기사

    조국이 문제다·윤석열이 문제다…요즘 나라가 '두쪽… 세쪽' 난 느낌'시비 가리지말라' 부처님 말씀 무색日·北·中·美 앞에서 두패로 갈려 난리패 나눈 어느 한쪽 선택당하지 않길…토요일에는 춘원연구학회 주관의 학술대회가 있었다. 춘원은 이광수의 호, 그러니까 이광수 문제를 연구하는 학회다. 서울여자대학교 정문 앞 어문교육회관이 대회 장소, 필자는 여기서 '김구의 '백범일지'와 이광수'라는 주제로 발표를 하도록 되어 있었다.김구라면 기미년 삼일운동 직후 중국 상하이로 가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한 이래 광복 때까지 독립 투쟁에 헌신한 분인데, 어째서 이 분의 '자서전' '백범일지'가 '대일협력자'로 '악명' 높은 이광수에 의해서 정리될 수 있었던 것일까? 이미 김원모 선생 같은 역사학자가 이 문제를 논문으로 밝힌 적도 있지만 역사와 문학이 만나고 항일 독립운동가와 대일협력자가 만나는 이 진귀한 풍경을 명쾌하게 논의하기란 쉽지 않았다.몇 주간 이기웅 선생의 열화당에서 3년여 각고 끝에 2015년에 펴낸 '백범일지' 한글 정본을 가지고 다니며 '상권', '하권', '계속' 편 등으로 이루어진 김구 '직필'의 '백범일지'을 읽다 보니 모르던 사실도 많고 '깨닫는' 일도 많다. 그중에 생각하게 되는 한 가지는 김구 선생이 '한국독립당'을 이끌어 나간 어떤 방침에 관한 것이다. 당시에 한국 독립운동가들은 사회주의자, 민족주의자 등이 여러 갈래를 치며 분립해 있었고 이 분산된 역량을 하나로 모을 지혜가 절실한 터였다. 이때 김구, 이시영, 조소앙, 차리석 등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한국독립당이 내건 이념은 '독립'이라는 것이었다. 지금은 나라를 일본에 빼앗겼으니 어떤 주의보다 앞서는 가치는 독립일 것이요, 이 독립이 이루어지고서야 민주주의든 공산주의든 그 밖의 어떤 주의든 독립된 사회를 어디로 만들어 가자는 논의가 현실성을 이룰 수 있을 것이요, 그러므로 현재는 모든 주의자들이 공감할 수 있는 하나의 가치 '독립'을 향해 나아가자는 것이 바로 한국독립당의 취

  • [방민호 칼럼]사람의 통성으로 역사를 생각할 때

    [방민호 칼럼]사람의 통성으로 역사를 생각할 때 지면기사

    동북부 대지진·후쿠시마 원전 참상日 국민 마음에 큰 구멍 뚫렸을 것'제국'의 총칼 아래 삼십오년 고통조국 산야 잃은 마음은 어떠했을까'아베' 같은 이들에게 묻고 싶은 말3·11 때가 생각난다. 2011년이었을 것이다. 일본 동북부에 리히터 규모 9.0의 대지진이 발생했다. 정확히 말하면 앞바다에서 발생한 지진이 동북부를 강타하며 거대한 쓰나미를 몰고 온 것이었다. 그때 한국에서 유튜브가 막 활성화되고 있었다. 전 세계가 인터넷으로 하나가 되어 있는 세상에서 나는 한밤 내내 유튜브를 통해서 전달되는 대지진과 쓰나미의 참상을 보고 안타까워했다.재난은 단지 땅이 흔들리고 바다가 밀려오는 것에만 있지 않았다. 미증유의 규모였지만 그렇게 갈라지고 넘어지고 휩쓸려 유명을 달리하는 일도 시간이 지나면 어떻게든 아물고 일상으로 돌아올 수도 있다. 그러나 연이어 벌어진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태는 그날의 일들을 도저히 잊어버릴 수 없는 일들로 만들었다. 모두 네 개의 원자로가 있었고 그것들이 갑작스러운 정전으로 작동이 중지되면서 냉각수를 돌리는 기능들이 마비되고 원자로가 달구어지면서 노심이 녹고 수소폭발이 일어나고 원전 사람들이 황급히 대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요즘 풍문에 들으면 원래 곡창지대고 과일도 잘 되는 곳이라 했다. 그 좋은 땅들이 그날 이후 사람이 제대로 들어가 살 수 없는 곳으로 변했다. 나는 그날 일본 사람들의 마음에 큰 구멍이 뚫리고 말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국토를 사랑하기는 일본 사람도 한국사람 못지않고 자신들만큼 완전하게 무엇인가를 해내온 사람들도 없다고 생각하는 그네들이다. 그런 사람들로서 뜻하지 않은 원전 사태로 후쿠시마 주변 반경 몇십 킬로미터까지는 아예 버려진 땅이 되어 버렸을 때 그들의 심정은 어떠했을 것인가?필자가 무슨 특별한 동정심을 가진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고 보면, 이렇게 남이 아픈 일을 당하면 동정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은 역시 사람의 보편적인 심성에서 우러나는 감정의 작용이라 할 것이다. 사람은 자기 새끼손톱 밑에 조그만 상처만 나도 아려하고 괴로워하는 짐승이다. 하

  • [방민호 칼럼]트럼프 대통령

    [방민호 칼럼]트럼프 대통령 지면기사

    우방 관계 해친다는 비판 '아랑곳'김정은 치켜올리면서도 대북제재 사업가 출신… 협상 성공법 '자신'평화 유지될 수 있으니 나쁘지 않아기대·우려 함께 품고 기다려 볼 뿐미국 트럼프 대통령이 군사분계선을 넘는 장면은 아주 인상적이었다. 그는 북한의 김정은 위원장의 안내를 받으며 북한 쪽 지역으로 건너가 미국 대통령으로서는 북한 지역에 발을 디딘 첫 대통령이 되었다.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될 때 말들이 아주 많았다. 미국의 지성인들은 모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고 했다. 유럽에서도 트럼프 당선은 무슨 재앙이라도 만난 듯 충격을 받고 있다고 했다. 지금도 그는 미국의 언론 주도층의 지지를 얻고 있는 것 같지는 않고, 때문에 페이스북 같은 신종 '독립' 매체를 통한 직접 호소 방식을 즐겨 활용한다. 그가 한국인들의 관심 대상이 된 것은 지난 대통령 선거 때가 고작이었던 것 같다. 처음에 그의 이미지는 그렇게 긍정적이었던 것 같지 않다. TV 화면에 나타난 그의 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과장된 것 같았다. 강한 자신감을 피력한다기보다는 연기를 하고 있는 것 같은 인상을 주었다. 바다 건너에서 보기에도 어째서 미국인들이 저렇게 안정감 없어 보이는 사람을 대통령으로 뽑은 걸까 하고 의구심을 갖게 만드는 점이 없지 않았다.원래 미국 공화당은 우파, 보수파라 하고, 민주당은 좌파도 더러 섞인 진보파라 생각하는 게 통상적이다. 당연히 미국 공화당은 한국으로 보면 현재의 야당에 가까운 정강 정책들을 가졌을 법하다. 민주당은 또 우리의 여당에 가까울 것이라 생각하게 된다. 트럼프의 대북 정책은 그런 통념을 바꾸어 놓았다. 지금 민주당의 유력 후보 가운데 하나인 존 바이든은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트럼프의 대북 정책을 맹렬하게 비판했다고 한다. 그의 대북 유화 제스처가 일본과 한국 같은 전통적 우방들과의 관계를 해치고 있다는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다. 김정은과 자신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며 앞으로 북한이나 김정은에게서 어떤 일들이 일어날지 지켜보자는 것이다. TV 앞에서 한국과

  • [방민호 칼럼]'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

    [방민호 칼럼]'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 지면기사

    박경리~최인훈 사이 세대 박완서첫 소설 '나목' 욕망·양심 드라마단편 '…가르칩니다' 병적 감수성윤리적 양심의 뿌리, 늘 의식하는'부끄러움'의 능력에 무릎을 탁 쳐작가 박완서 선생은 1931년에 경기도 개풍군, 지금은 갈 수 없는 휴전선 위쪽에서 나서 2011년 불과 몇 년 전에 담낭암으로 유명을 달리한 작가다.나는 먼저 선생의 세대적 위치를 가늠해 본다. 박경리 선생은 1926년생 그의 성장기 전체는 일제 강점기에 걸쳐졌다. 태평양 전쟁과 이후 육이오 한국전쟁을 통하여 문학의 문제를 생명의 문제로 초점화할 수 있었다. 최인훈은 1936년생이고, 함경북도 회령에서 태어나 원산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니던 중 사회주의 체제 교육을 접했다. 1·4후퇴를 얼마 앞두고 원산철수로 부산에 내려온 선생은 평생을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적 자유주의, 이 두 20세기 사상이 내건 숙제들과 싸우는데 바쳤다.박완서 선생은 이 둘 사이에 끼인 세대의 작가였다. 그녀는 일제 말기에 숙명여고에 들어가 해방 후에 숙명여고로 졸업했으니 1950년 5월이었다. 곧이어 육이오를 맞는 바람에 대학 입학과 더불어 수학은 좌절되고 6·28 서울 함락부터 9·28 수복에 이르는 3개월여를 인민군 치하에서 보낸다. 다시 1·4 후퇴 이후의 정적 감도는 서울에 남은 끝에 전쟁의 죽음과 폐허, 모순과 불합리를 겪을 만큼 겪은 사람으로 남게 된다.이 선생의 첫 작품은 젊었을 때 미군 PX 초상화부에서 일하면서 알게 된 박수근의 그림을 모델로 삼은 장편소설 '나목'이다. 선생은 여기서 선생 자신을 썩 빼어 닮은 여성 주인공 이경과 박수근을 모델로 그린 화가 옥희도의 사랑을, 그리고 대학을 두 해 다니다 군대에 갔다 온 전공 '황태수'와 미군 '죠오' 사이에서의 방황과 선택을 그렸다.이경은 여기서 자신의 잘못된 제안으로 행랑채에 숨어 있던 두 오빠의 죽음을 목도해야 했다. 그럼에도 젊고 살아 있기 때문에 사랑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갈망하는 여성이었다. 이 이경은 자연으로 돌아가는 박경리의 '생명'의 여인도 아니요, 좌우익 선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