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전직 대통령들은 언제 진정한 의미의 정치인이 됐을까. 27일 인천 중구 복합문화공간 ‘개항도시’에서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강연이 열렸다.

개항도시는 지난달 1일부터 전직 대통령 4명(박정희·김영삼·김대중·노무현)의 자서전을 집필한 인물들을 강연자로 초청해 ‘대통령을 말하다’를 주제로 인문학 강좌를 열었다. 강좌를 기획한 개항도시 최석호 대표는 이번 강좌의 마지막 강연자로 나서 4명의 전직 대통령이 진정한 정치인이 된 순간을 짚었다.

27일 인천 중구 복합문화공간에서 열린 개항도시 인문학 강좌 ‘대통령을 말하다’의 마지막 강연자로 나선 최석호 대표가 대한민국 전직 대통령들이 정치인이 된 시기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2025.5.27 /한달수기자 dal@kyeongin.com
27일 인천 중구 복합문화공간에서 열린 개항도시 인문학 강좌 ‘대통령을 말하다’의 마지막 강연자로 나선 최석호 대표가 대한민국 전직 대통령들이 정치인이 된 시기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2025.5.27 /한달수기자 dal@kyeongin.com

최 대표는 강연 시작과 함께 “전직 대통령들은 언제 정치인이 됐다고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이어 “자신이 생각한 바를 실현하기 위해 협상하는 과정을 겪으며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순간”이라고 정의했다.

최 대표는 이를 기준으로 4명의 전직 대통령이 ‘정치인이 된 순간’을 설명했다. 그는 18년 동안 집권한 박정희 전 대통령이 진정한 정치인이 된 시기를 1975년으로 짚었다. 당시 캄보디아와 베트남이 공산화하면서 한반도 역시 남북관계 긴장감이 높아진 시기다.

1972년 ‘10월 유신’을 통해 장기집권의 발판을 마련한 박 전 대통령이 야당을 향해 손을 내민 것도 이 시기다. 당시 제1야당이었던 신민당 당수 김영삼 의원과 영수회담을 진행해 야권의 협조를 호소했다. 2시간 동안 배석자 없이 독대한 두 사람은 유신체제 타파와 민주주의를 통한 직선제를 두고 논의했다.

김영삼 의원의 직선제 제안에 박 전 대통령은 “민주주의를 하겠다. 대신 잠시만 시간을 달라. 오늘 대화한 내용은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자”고 답했다. 그의 말을 믿은 김영삼 의원은 약속을 지켰다.

최 대표는 “박 전 대통령이 재임하면서 ‘협상’을 한 건 이 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며 “결론적으로 박정희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지만 자신의 임기를 연장하며 원하는 바를 이뤘고, 이를 간파하지 못한 김영삼은 정치인이 되지 못했다”고 했다.

박 전 대통령을 믿었다가 낭패를 본 김영삼 전 대통령은 언제 진정한 정치인이 됐을까. 최 대표는 1979년 신민당 전당대회를 통해 총재직에 오른 시기라고 설명했다. 박정희 정부는 제1야당의 전당대회를 앞두고 중앙정보부를 비롯한 정보기관을 동원해 야당 의원들을 매수하며 자신들이 원하는 인물을 총재로 세우는 공작 정치를 펼치고 있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이를 타파하기 위해 자신의 정치 스타일을 바꿨다. 이전까지는 혼자 정면돌파하며 직선적으로 부딪혔지만, 1979년 전당대회를 앞두고 ‘연대’에 나선 것이다. 자신의 정치적 라이벌이었던 김대중, 한때 ‘구태 정치인’이라 비판하며 거리를 뒀던 윤보선 전 대통령, 재야의 핵심 인사였던 함석헌 선생 등을 찾아 지지를 호소했다.

이른바 ‘반 유신체제’ 인사들의 지원을 받은 김영삼은 중앙정보부의 방해를 이겨내고 신민당 총재에 당선된다. 최 대표는 “반대 계파는 물론 자신과 등을 졌던 인사들과 손을 잡기 위해 협상하면서 제1야당의 대표가 된 그 순간이 김영삼 전 대통령이 진정한 정치인이 된 시기”라고 평가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정치인이 된 순간은 김영삼 전 대통령보다 훨씬 빠르다는 게 최 대표의 생각이다. 1967년 7대 국회의원 선거 당시 자신의 정치적 고향 목포에서 출마를 선언한 김대중 전 대통령은 여당의 부정선거 이슈를 부각하며 유권자들의 지지를 호소했다.

당시 여당인 공화당은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목포까지 내려와 국무회의를 주재할 만큼 공을 들였다. 고무신과 막걸리를 유권자들에게 대거 뿌리는 ‘금권 선거’로 유명했던 선거기도 하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목포 시내를 돌며 부정선거에 정면으로 맞서겠다는 의지를 남기기도 했다. 그는 목포 유세에서 “내가 만약 부정선거로 쓰러지면 내 시체 위에 꽃을 던지기 전에 부정선거를 획책한 원흉들을 때려 눕혀달라”고 했다.

목포 시민들은 개표가 진행되던 목포의 한 초등학교 주변을 둘러싸고 부정선거를 감시했다. 최 대표는 이 장면을 두고 “김대중 전 대통령은 정치는 결국 정치인이 아닌 시민이 아는 것이라는 걸 이 당시부터 깨달았던 사람”이라며 “여당의 공세에 맞서 시민들에게 지지를 호소한 순간에 이미 진정한 정치인이 됐다”고 했다.

대한민국 국민이 가장 좋아하는 전직 대통령 조사에서 1위에 오른 노무현 전 대통령은 언제 정치인이 됐을까. 최 대표는 “노 전 대통령은 임기가 끝나고 나서야 진정한 의미의 정치인이 됐다”고 했다.

노 전 대통령은 재임 기간 중 야당을 향해 대연정을 제안하고, 국민들에게 적극적으로 정책을 설명했으나 번번이 외면받았다. 그의 정치적 철학과 구상은 세상을 떠난 뒤에야 재평가를 받았다.

최 대표는 “노 전 대통령은 세상을 떠나고 나서야 국민이 가장 좋아하는 대통령이 됐다”며 “재임 중에서는 엄청난 비판을 받고 여야 할 것 없이 외면했지만, 그가 실현하고자 했던 정치적 구상이 뒤늦게 빛을 보면서 비로소 진정한 의미의 대통령이 됐다”고 했다.

/한달수기자 dal@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