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 퇴각 계기 만든 행주대첩

물길 익숙한 권율, 수적 열세에도

산성 파악·철저한 준비 대승 거둬

고양 덕양산 정상에 대첩비 우뚝

그날 함성 한강 따라 서해 울리는듯

임진왜란 3대첩 중 한강과 한양을 지킨 행주대첩 초건비와 행주대첩비. /최철호 소장 제공
임진왜란 3대첩 중 한강과 한양을 지킨 행주대첩 초건비와 행주대첩비. /최철호 소장 제공
최철호 성곽길역사문화연구소 소장
최철호 성곽길역사문화연구소 소장

‘이순신은 한산에서, 권율이 행주에서 이긴 공로는 중흥을 연 것이었는데…’. 조선왕조실록 중 1653년(효종 4) 기사다.

이순신과 권율 장군 이야기는 모르는 사람이 없다. 두 장군은 임진왜란 후 국가의 위기마다 소환되었다. 이순신 장군에 얽힌 이야기는 많다. 통영에서 남해에서 여수에서 아산에서 충렬사를 가 보지 않은 사람이 없다. 또한 이순신 장군 묘가 있는 아산 현충사는 모두 한 번쯤 가 보았다. 하지만 행주산성은 알아도 덕양산은 잘 모른다. 임진왜란 3대첩 중 행주대첩(幸州大捷)으로 일본군이 퇴각하는 계기인 줄도 모른다. 행주산성은 서해에서 서울로 향하는 관문이었다. 강화와 김포 사이 염하에서 조강 지나 교하까지 행주산성은 서울의 목구멍이었다. 행주산성에서 창릉천 거슬러 가면 서오릉 지나 벽제관이 나온다. 432년 전 임진왜란 이듬해 한양 수복을 위해 고양 벽제관(碧蹄館)에서 조명연합군이 일본군과 싸웠으나 졌다.

당시 바다에 이순신 장군이, 육지에 권율 장군이 있었다. 류성룡이 선조에게 강력하게 천거한 인물이 이순신과 권율이었다. 전투 중에도 둘은 서신을 왕래하며 위기의 국가를 구했다. 46세에 문과 급제 후 장군이 되어 이치대첩과 독산성 전투 그리고 행주대첩으로 승기를 잡았다. 그런데 권율 장군은 어디에서 태어났을까? 도성 안 서울도, 도성 밖 행주도 아니다. 권율은 아버지 임지인 강화부 선원면에서 났다.

고양특례시 덕양산 정상에서 바라본 행주대첩비각과 덕양정 그리고 한강 위 방화대교. /최철호 소장 제공
고양특례시 덕양산 정상에서 바라본 행주대첩비각과 덕양정 그리고 한강 위 방화대교. /최철호 소장 제공

강화 관아에서 바다는 가깝다. 강화 갑곶과 염하 건너 월곶 및 문수산성까지 군사 요충지다. 권율은 바닷길을 잘 알고 있었다. 또한 한강을 거슬러 오르는 물길 역시 누구보다 몸으로 느끼며 살았다. 임진강과 한강이 만나는 교하, 행주산성 지나 양천 궁산성까지 모든 것이 그의 머리에 있었다. 어린 시절 바다와 한강 물길을 살피며 행주산성을 섬세하게 그릴 수 있었다. 전라도 절제사 권율은 육지 전투에서 승리하며 한양도성까지 왔다.

이치전투는 곡창지대 전라도를 사수하고 보급로를 유지해 이순신 수군까지 지켰다. 곡창지대를 지켜야 하는 싸움이 이치대첩(梨峙大捷)이었다. 또한 오산 독산성에서 전략적 승리로 병사들이 하나둘 모였다. 당시 전라도 순찰사 권율의 깃발 아래 전라도 도사 최철견, 전라도 병사 선거이, 전라도 조방장 조경, 익산군수 고성후, 고산현감 신경희, 백의종군으로 활동한 권율 형 권순 그리고 승병을 이끈 승장 처영까지 관군과 승군이 2천300여 명이었다.

1986년 건립된 후 행주산성을 지키는 충장공 권율 도원수 상. /최철호 소장 제공
1986년 건립된 후 행주산성을 지키는 충장공 권율 도원수 상. /최철호 소장 제공

하지만 벽제관 전투에서 승리한 일본군 7개 부대가 1593년 2월12일 새벽 6시부터 저녁 6시까지 7차례에 걸쳐 3만명이 공격하였다. 수적 열세에도 한강을 배수진 삼고 지형을 잘 활용하였다. 행주산성 입구가 호리병처럼 좁고 내성과 외성 그리고 목책과 습지를 이용한 전술로 승리하였다. 또한 행주산성을 지키는 것이 마지막 희망이라는 것도 2천300여 관군과 승군은 알았다. 단 하루만의 전투에서 지형을 활용한 방어 전략과 화차·비격진천뢰·신기전 및 천자총통 등 철저한 준비로 대승하였다.

한강을 거슬러 온 숨은 영웅 정걸 장군의 배 2척 수만발 화살이 싸움의 방향을 바꾸었다. 고양시 행주내동 덕양산 124m 정상에 행주대첩비가 우뚝 서 있다. 그날의 함성이 한강 따라 서해까지 울리는 듯하다.

/최철호 성곽길역사문화연구소 소장

<※외부인사의 글은 경인일보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