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경계에서 다시 만난 이름들(上)
“정치는 관심 없습니다” 거짓말… 숨죽여야 했던 망국의 여성
1919년 3월2일 이화학당 기숙사 모인 11명
“남학생 거리 나섰는데 우린 어떻게할까”
“사회적 오해 살수도 있어…” 신중 의견도
이틀뒤 다시 만나 “각자 자유롭게 행동을”
사실상 만세운동 ‘신호’… 일제경찰 체포
그날밤 11명중 기억되는 이는 많지 않아
정치적 판단, 우연 모임·개인감정 치부돼
축소된 조서속엔 당시 여성 침묵의 무게

어떤 이름은 교과서에 남았지만, 어떤 이름은 기록물 속 단 한 문장으로 스쳐갔다.
1919년 3월, 거리마다 만세의 함성이 울려 퍼졌고 독립운동의 주인공들이 역사의 중심에 자리 잡는다. 그즈음 서울 정동의 한 기숙사 방 안에서는 또 다른 결심이 조용히 움트고 있었다.
열한 명의 여성이 모였다. 조직에 대한 논의 후 간사를 정하고, 자금 마련을 고민했다. 목소리는 낮았고 숨죽인 기척만이 방 안을 맴돌았던 그 밤은 기억에서 잊혔지만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겹쳐진 진술, 엇갈린 기억, 짧은 문장으로 흩어진 조서 속 말들. 이 안에는 일제 경찰이 남긴 기록과 여성들의 진술이 겹쳐지며 그날 밤의 흔적을 드러낸다.
100여 년 전 일제가 작성한 신문조서와 판결문을 다시 펼치는 일은 오래전 이름을 잃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되짚는 작업이기도 하다. 국가의 말이 아닌, 누군가의 입에서 미처 다 말해지지 못한 채 남겨진 문장들. 그 조각들 속에서 우리는 또 다른 독립운동의 풍경을 마주하게 된다.
경인일보 특별취재팀이 두 편에 걸쳐 이어갈 이번 이야기는 먼저 1919년 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만세운동을 준비하던 그날의 숨죽인 시간에서 역사의 뒷면에 남겨졌던 장면 하나가 다시 열린다.

그날 밤, 무슨 일이 있었나
1919년 3월2일 밤, 정동 이화학당 기숙사. 대부분 불이 꺼졌지만, 한 방만은 오래도록 불빛을 밝히고 있었다. 그 방은 교사 박인덕(1896~1980)의 숙소였다. 긴장한 표정의 학생과 졸업생, 교사들이 책상 주위에 모였다. 회의는 누가 먼저 입을 열었는지조차 명확지 않게 시작됐다.
“어제 남학생들이 먼저 거리로 나섰는데, 이제 우리 여성들은 어떻게 할까요?”1
김마리아(1891~1944)의 입에서 나온 이 말은 단순한 질문이 아니었다. 그 말은 회의 방향을 결정지었다.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어떤 방식으로 참여할 것인가. 여성들이 ‘정치의 주체’로 나서는 것을 두고 방 안의 공기는 묵직해졌다.
황애시덕(1892~1971)은 정리된 제안을 꺼냈다. “여성 단체를 만들고, 남성 조직과 연락하며, 개인적으로도 접촉합시다.”2
나혜석(1896~1948)은 세 번째 제안에 신중함을 보였다. “그건 사회적 오해를 살 수 있으니 조금 더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요?”3
손정순(생몰년 미상)은 실질적인 문제를 제기했다. “그런데 거리로 나가려면 자금이 필요하지 않을까요?”4 그 순간 나혜석은 무언가 결심한 듯 입술을 굳게 다문 채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가는 일단 각자 알아서 자금을 마련하자고 말했지만, 이내 복도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예배를 마친 학생들이 복도에 가득 찼고 회의는 멈췄다.
3월4일, 다시 모이다
두 번째 회의는 이틀 뒤인 3월4일에 열렸다. 나혜석은 그날 참석하지 못했다. 이미 경성역에서 기차를 타고 개성과 평양으로 떠난 뒤였다. 그는 지방 여성들을 설득하고 자금을 구하러 홀로 나섰다.5
남아 있는 이들은 조직을 구체화했다. 간사로 황애시덕, 김마리아, 박인덕, 나혜석 4인이 선출됐다.6 이날 회의는 병실에서 열렸다. 회장은 정해지지 않았지만 “각자 자유롭게 행동하자”는 방향으로 정리됐다. 박인덕은 이후 조서에서 이렇게 진술했다. “회의는 미결 상태로 끝났고, 자금도 다음으로 미뤘다.”7
신준려(1898~1980)는 4일 회의에서의 상황을 이렇게 밝혔다. “그날은 단체를 조직하기로 했고 간사도 뽑았다. 나는 학생들에게 각자 자유롭게 행동하자고 말했다.”8
그는 초기 경찰서 진술에서 “참여하지 않았다”고 말했지만, 나중에 “그건 거짓말이었다”고 정정했다.9 여성이라는 이유로 판단 능력을 의심받던 시대, 책임을 피하려는 회피가 아니라 감춰야만 했던 사정이 더 많았다.
만세운동, 그리고 체포
드디어 조용한 결의가 거리로 터져 나온 날이었다. 1919년 3월5일, 서울 시내 곳곳에서는 수천 명이 참여한 대규모 만세 시위가 벌어졌다. 태극기를 든 학생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고 종로와 서대문 일대는 함성으로 뒤덮였다. 이화학당도 예외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날, 여교사 김덕실(생몰년 미상)은 학생들과 함께 시위에 나간 뒤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장필순(생몰년 미상) 교사는 만세를 외치다 순사에게 폭행당했고, 피를 흘리며 학교로 돌아왔다는 이야기가 퍼졌다.10
학생과 교사들 사이에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나설 것인가, 멈출 것인가. 누구도 답을 주진 않았지만 교실 안엔 묘한 기류가 감돌았다. 당시 교사였던 신준려는 그날 아침 식사 시간 식당에 모인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조사 과정에서 진술했다.
“각자 마음대로 행동하라.”11
그 말은 강요도, 허락도 아니었지만 분명한 신호였다. 움직임은 이미 시작됐고 선택은 각자의 몫이었다. 며칠 뒤 박인덕, 김마리아, 나혜석, 황애시덕, 신준려, 안숙자(1895 추정~?) 등 회의에 함께 했던 인물들이 일제 경찰에 체포됐다. 죄목은 ‘보안법 위반’. 신문조서에는 ‘단체 조직’ ‘간사 선출’ ‘학생 선동’이라는 말이 반복됐다. 여성들이 기획하고 결정한 행동이 일제에 의해 범죄 혐의가 돼 되돌아온 순간이었다.

기억되지 않았지만, 분명히 존재했던 이름들
그날 밤 자리를 함께했던 열한 명의 여성 가운데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이름은 손에 꼽힌다. 김마리아와 황애시덕은 독립운동가로, 나혜석은 예술가로 교과서의 한 줄로 남았다. 그러나 나머지 이름들은 대부분 신문조서의 짧은 문장 속에만 존재한다. 말할 수 없었고, 말하지 않기로 한 흔적만이 남았다. 경찰서에서 축소됐던 진술은 시간이 흐른 뒤에는 역사에서조차 흐릿해졌다. 조직의 시도는 우연한 모임으로, 정치적 판단은 개인의 감정으로 바뀌었다.
그들을 지운 건 단지 식민지 권력의 탄압만은 아니었다. 누군가를 기억하는 방식, 그리고 누군가를 지워내는 방식은 해방 이후에도 계속됐다. 그리고 그 모든 시작은 마치 약속처럼 반복된 신문조서 속 한 문장에서 비롯됐다.
“정치에는 관심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 조서들을 다시 읽는 이유는 이 문장이 던지는 질문 때문이다. 그들은 왜 그렇게 말해야만 했을까. 그리고 우리는 무엇을 기억하지 않았던가.
기숙사에 모인 11명의 이름과 ‘정치적 침묵’… 그날 밤, 어떤 여성이 있었는가?
신문조서 내용을 종합하면 당시 이화학당 회의에 참석했던 여성은 총 11명이었다. 이름은 조서마다 약간씩 다르지만, 나혜석은 “그날 밤 열한 명이 모였다”고 진술했다. 이 중 오늘날 이름이 남아 있는 이는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그러나 신문조서 속에는 각 인물의 발언, 행동, 망설임과 결심이 생생하게 남아 있다. 그날의 장면을 말하는 이들의 목소리는 완벽히 일치하지 않는다. 누가 먼저 입을 열었는지, 누가 무슨 제안을 했는지에 대해 나혜석과 김마리아 등의 진술은 미묘하게 다르다.
그 어긋남은 단순한 기억의 흔들림이라기보다, 누가 무엇을 말할 수 있었고 무엇을 말하지 않기로 했는가를 보여주는 하나의 징후다. 신문조서 속 서로 다른 문장들 사이에서 우리는 당시 여성들이 감당해야 했던 ‘정치적 침묵’의 무게를 엿볼 수 있다.
나혜석과 김마리아, 이유 있는 엇갈린 진술
1919년 3월 18일 신문조서 살펴보니
모임 성격 인정한 나, 일일이 부정한 김
활동중인 독립운동조직 보호하려 한듯
1919년 3월18일, 경성지방법원 검사국.
조선총독부 검사 야마자와 사이치로는 나혜석과 김마리아를 같은 날 신문했다. 동일한 사건에 대한 두 사람의 진술은 주요 대목에서 엇갈린다.
두 사람 모두 3월2일 정동교회에서 만나 이화학당 기숙사로 간 사실은 인정했다. 그러나 먼저 권유한 사람이 누구였는지는 다르게 진술했다. 나혜석은 “김마리아가 가자고 했다”고 했고, 김마리아는 “별 생각 없이 따라갔다”고 말했다.
당시 모임의 성격도 달랐다. 나혜석은 “11명이 참석했고 김마리아가 ‘여성들도 독립운동을 해야 하지 않느냐’며 먼저 말을 꺼냈다”고 했다. 그러나 김마리아는 “회의라 할 수도 없는 자리였고, 점심이 되어 흩어졌다”고 했다. 나혜석이 먼저 말한 사실도, 그렇게 많은 인원이 모인 것도 부정했다.
회의 내용 역시 충돌했다. 나혜석은 황애시덕이 세 가지 방안을 제안했다고 구체적으로 진술했다. 반면 김마리아는 그런 말이 “있기는 했으나 미결 사항이라 진술하지 않았다”고 했다. 김마리아가 임원 선출이나 행동 방안을 이끌었다는 나혜석의 진술을 전면 부인한 것이다.
자금 조달에 관한 진술도 다르다. 나혜석은 “회의 말미에 돈 이야기가 나왔고, 4일을 기약한 뒤 자금 마련을 위해 개성과 평양으로 향했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김마리아는 “그런 말은 들은 적 없고, 나혜석의 외출 이유도 모른다”고 했다. 오히려 4일 회의에는 자신만 참석했고, 나혜석은 그 자리에 없었다고 명확히 밝혔다.
검사의 질문은 양쪽 진술의 불일치를 수차례 지적하며 교차 확인하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특히 “나혜석의 진술에 따르면…”이라는 말머리로 시작되는 질의가 반복되며 진술의 신빙성을 따지는 흐름이 이어졌다.
이런 차이는 단순한 기억의 왜곡이나 사실관계의 착오로 보기 어렵다. 김마리아는 실제 독립운동 조직의 일원으로 활동했으며, 훗날 독립유공자로 공식 인정받은 인물이다. 조선총독부 검사 앞에서 그는 보다 큰 조직과 동료들을 보호하기 위해 구체적 언급을 피하거나 사실을 부인하는 태도를 취한 것으로 보인다. 반면 나혜석은 상대적으로 실무 조직에서 벗어난 위치에 있었기에 보다 구체적이고 직설적인 진술을 남길 수 있었던 것으로 해석된다.
[출처]
1) ‘나혜석 신문조서’, 1919년 3월18일
2) ‘황애시덕 신문조서’, 1919년 3월21일
3) ‘나혜석 신문조서’, 1919년 3월18일
4) 위와 같은 조서
5) 위와 같은 조서
6) ‘황애시덕 신문조서’, 1919년 3월21일
7) ‘박인덕 신문조서’, 1919년 3월18일
8) ‘신준려 신문조서’, 1919년 3월20일
9) 위와 같은 조서
10) 위와 같은 조서
11) 위와 같은 조서

/유혜연기자 pi@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