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새벽 벌어진 국민의힘 후보 재공모 난

분명한 자아도 없이 권력 창출·향유에만 급급

균형 발전·민주주의를 위해 마땅히 달라져야

얼마나 걸릴지 모르겠지만 비전 새로 세워야

이충환 서울대 객원교수·객원논설위원
이충환 서울대 객원교수·객원논설위원

좀비(zombie)는 살아 움직이는 시체다. 16~19세기에 걸쳐 아프리카에서 서인도제도의 아이티로 팔려 온 흑인 노예들의 종교인 부두교가 등장의 배후다. 부두교에서 좀비는 사제이자 주술사인 보코에 의해 죽었다가 되살아난 존재를 일컫는다. 육체는 살아 있으되 영혼을 빼앗겨 자아와 의지가 없는 상태. 영혼 없는 이 존재는 보코의 명령에 따라 강제 노동에 투입되거나 특정한 목적을 위해 쓰였다.

부두교에서의 좀비는 가족과 집과 자유를 빼앗긴 채 비참한 모습으로 세상을 떠돌게 된 흑인 노예 자신들이었다. 죽음보다 더 참혹한 현실이 스스로를 생과 사의 경계가 불분명한 존재, 육체와 영혼이 분리될 수 있는 복합적인 상태로 인식하게끔 했고, 이런 흑인 노예들의 도피적 자아인식이 그네들의 종교 안으로 스며들어가 좀비라는 상징을 만들어냈을 것이다.

현대에 이르러 좀비는 대중매체, 특히 영화에서 각광받는 소재가 됐다. 1932년 ‘화이트 좀비’가 제작된 이후 무수히 많은 좀비 영화가 호러, 스릴러, 액션, 드라마, 코미디 등 장르를 불문하고 쏟아져 나왔다. 좀비는 시대를 배경으로 느리게 움직이는 놈, 빠르고 날랜 놈, 무지막지하게 힘센 놈, 비실비실한 놈, 무서운 놈, 웃긴 놈 등 다양한 캐릭터를 갖는데 한 가지 공통적이고 변함없는 사실은 놈들이 죽었음에도 자기가 죽은 줄 모른다는 점이다.

그런데 죽었음에도 죽었음을 모르는 건 비단 좀비만이 아니다. 안타깝게도 한국의 보수가 그렇다. 지난 연말 글에서 ‘8년 전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의 단두대에 올랐을 때 보수는 이미 궤멸했다’고 썼다. ‘긴 설명 필요 없이 보수의 목에 칼을 꽂았던 검사 윤석열이 엉겁결에 보수 진영의 대권주자가 된 그 자체가 보수 궤멸의 반증 아닌가’라고 썼다. 그런데 정말 운 좋게 그 용병대장이 권좌에 오르게 되자 이미 죽은 보수가 관 뚜껑을 열고 나와 권력의 주변을 배회하거나 권력의 단맛을 좇아 날뛰었다. ‘좀비 같았다’고 쓴 까닭이다.

지난달 10일 새벽, 보수를 표방하는 정당인 국민의힘에서 그런 ‘좀비 보수’들이 난을 일으켰다. 주류를 자처하는 세력이 정당한 절차를 거쳐 선출된 당의 대선 후보를 끌어내리고, 입맛에 맞는 당 밖의 인사를 대신 내세우려 했다. 우리는 물론 세계 정치사에서도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사건이다. 모두가 잠든 새벽 3시에 후보 재공모에 나서 단 1시간 만에 해치웠다. 모든 게 주류의 계산대로 착착 진행되는 듯했다. 하지만 당원들을 대상으로 한 찬반투표에서 급제동이 걸렸다. 극적인 반전이었으나 당은 만신창이가 됐다. 당사자인 후보는 자기 당이 괴물로 변했다고 탄식했다. 멀리 하와이에서 홍준표 전 대구시장은 ‘한×이 한밤중 계엄으로 자폭하더니 두×이 한밤중 후보 약탈 교체로 파이널 자폭을 하는구나’라고 일갈했다. 한동훈 전 당대표는 ‘북한도 이렇게는 안 한다’고 비판했다.

21대 대선이 막을 내렸다. 자신의 모든 것을 던지며 치열한 승부를 벌였던 당선자는 벅찬 감회로 오늘 새벽을 맞았을 것이다. 국가와 국민을 위한 다짐을 새로이 하면서 맞는 새날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의 보수에게 오늘은 전혀 다른 의미여야 한다. 보수의 미래를 위해서도 그렇거니와 우리 정치의 좌우 균형 잡힌 발전과 우리 민주주의 제도의 견고함을 위해서라도 마땅히 다른 오늘이어야 한다.

지난 10여 년간 한국의 보수는 좀비와 다를 바 없었다. 영혼 없는 몸뚱이였을 뿐이다. 보수로서의 분명한 자아도 없었고, 보수 가치의 실천적 의지도 없었다. 자유와 책임, 질서와 안정, 배려와 긍지는 잊힌 구호가 됐다. 공동선(共同善)을 위한 권력의 합리적인 행사와 견제를 망각한 채 오직 권력 창출과 향유에만 급급했다. 그 결과가 용병대장의 통치와 몰락, 그리고 당내 민주주의의 훼절과 파괴였다.

좀비 보수를 싹 쓸어내고 보수의 비전을 새로 세워야 한다. 10년이 걸릴지, 20년이 걸릴지 모를 일이지만 그럼에도 보수를 자처하는 누군가 그런 각오를 다지는 오늘이어야 한다.

/이충환 서울대 객원교수·객원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