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배 전 테니스 국가대표 감독

1973년 데이비스컵 대회서 해방 후 첫 한일전 승리

개성 출신 실향민 조부모, 배다리시장 이불가게 어머니

상인천중 정구 선수 생활… 인천고에서 전국 최강으로

대학 때 테니스 전환해 국가대표… 88올림픽 감독 맡아

다른 선수들 소고기 먹을 때 나는 준치 먹고 운동했어요. ‘썩어도 준치’ 할 때 그 준치 맞아요.

지난달 23일 오후 인천 미추홀구 인천고등학교 정문 앞에서 김성배 전 테니스 국가대표 감독이 테니스 경기할 때의 옷차림으로 라켓을 들고 서있다. 2025.5.23 /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지난달 23일 오후 인천 미추홀구 인천고등학교 정문 앞에서 김성배 전 테니스 국가대표 감독이 테니스 경기할 때의 옷차림으로 라켓을 들고 서있다. 2025.5.23 /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한국에서 테니스의 인기가 치솟은 시점은 명확하다. 1973년이다. 그해 3월23일 서울운동장(현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에서 열린 ‘데이비스컵 국제 테니스 대회’ 아시아 동부 지역 예선에서 한국 대표로 출전한 김성배는 당시 일본의 에이스 카미와즈미를 3대 0으로 꺾었다. 8·15 해방 이후 한국 선수가 일본 선수를 상대로 공식 테니스 경기에서 처음으로 승리를 거둔 순간이다. 국제테니스연맹(ITF)이 주최하는 데이비스컵은 ‘테니스의 월드컵’으로 불린다.

당시 주요 일간지는 ‘테니스계 대망… 김성배의 일승’ ‘좁혀진 한·일 격차’ 등의 제목을 달아 승리 소식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그해 연말 조선일보는 ‘올해의 스타 플레이어’(12월8일자 기사)로 테니스 종목에서 김성배를 선정했다. 경향신문은 같은 해 12월26일자 신문에서 ‘73년의 스포츠, 붐을 이룬 테니스’란 제목의 기사로 이렇게 보도했다.

“테니스는 올해 우리나라 스포츠계에서 가장 큰 붐을 이루었다. 서울의 경우 사설 코트가 지난해 5개에서 81개로 늘어났고 26일 현재 테니스협회에 등록된 전국의 테니스클럽은 310개, 회원 수는 지난해 1천918명에서 7천330명으로 늘었다. (중략) 3월의 데이비스컵 테니스 아시아 동부 지역 예선전에서 김성배가 일본의 최강 카미와즈미를 3대 0으로 물리쳐 한국의 남자 테니스계 처음으로 일본을 꺾어본 첫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한국 테니스 열풍의 시초이자 주역, 김성배 전 테니스 국가대표 감독은 인천 출신이다. 그동안 인천에서 잠시 잊혔던 스포츠 스타를 ‘아임 프롬 인천’ 52번째 주인공으로 다시 호명했다. 지난달 23일 오후 테니스 복장을 갖추고 온 김성배 감독을 그의 모교 인천고등학교에서 만났다. 30년 넘게 KBS 해설위원으로 활약했던 김 감독은 말솜씨도 유쾌했다.

■인천고 정구 선수로 정상 올라

김 감독은 1948년 인천 금곡동에서 태어나 경동과 율목동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개성에서 장사를 했던 조부모는 한국전쟁 때 인천으로 피란을 왔다. 인천에서도 장사로 돈을 잘 벌었다고 한다. 어머니는 경인전철 철길 옆 배다리시장 입구(현 중앙시장 혼수특화거리) 쪽에서 ‘보성상회’라는 간판을 단 이불 가게를 열었는데, 이곳 또한 “알만한 사람은 다 알 정도”로 장사가 잘되는 가게였다고 한다.

송림초등학교 5학년 무렵 지병을 앓던 아버지의 건강이 급격하게 악화됐다. 아버지는 서울역 앞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했는데, 김 감독은 주말마다 경인전철을 타고 아버지를 보러 간 기억이 아직 생생하다. 이듬해 1월 부친은 세상을 떴다.

“중학교도 시험을 치르고 들어가던 시절이었어요. 초등학교 6학년 때 진학할 중학교를 결정해야 하는데, 담임 선생님이 저희 어머니한테 당시 최고 명문이었던 인천중학교는 제 성적이 조금 부족하고, 상인천중학교는 넉넉하니 상인천중을 지원하라고 했죠. 그게 운명이었는지, 상인천중에 진학하면서 정구를 만날 수 있었죠.”

김 감독은 1960년 상인천중학교에 입학하면서 정구부 활동을 시작했다. 정구는 2019년 ‘소프트테니스’로 공식 명칭이 바뀌었으나, 김 감독이 활동하던 시대 상황을 고려해 이번 편에서는 정구로 표현한다. 정구와 테니스는 사용구와 경기 규칙에 차이가 있다. 당시 상인천중은 인천고등학교(1971년 주안동으로 이전)와 율목동에서 한 울타리에 있었다. 상인천중 정구부는 인천고 정구부와 함께 코트를 썼다. 김 감독은 자연스럽게 인천고로 진학해 정구 선수로서 활동을 이어갔다.

지난달 23일 오후 인천 미추홀구 인천고등학교 백주년기념관에서 김성배 전 테니스 국가대표 감독이 1960년대 인천고 정구부 활동 당시 이야기를 하고 있다. 2025.5.23 /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지난달 23일 오후 인천 미추홀구 인천고등학교 백주년기념관에서 김성배 전 테니스 국가대표 감독이 1960년대 인천고 정구부 활동 당시 이야기를 하고 있다. 2025.5.23 /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김 감독은 1964년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인천고 정구부 에이스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인천고·상인천중 총동문회가 2015년 발간한 ‘인고 120년사’를 보면, 인천고 정구부는 함양수, 김성배 등의 활약으로 1964년 6월 대한연식정구협회 주최 전국 고교 정구대회, 8월 종목별 선수권 대회, 9월 제45회 전국체육대회, 10월 강원도에서 열린 국무총리기 쟁탈전, 11월 한국학생연맹 주최 전국정구대회 등 그해에만 5회 연속 우승을 차지하며 국내 최강팀의 입지를 굳혔다.

“고등학교에서는 상대할 사람이 없을 정도였어요. 정구는 일본이 창안한 운동이라서 일본, 한국, 대만 정도만 했죠. 고등학교 2학년 때 3개국 대항전의 국가대표를 선발하는 대회에 출전해 2등을 했습니다. 국가대표로 뽑혀서 대만에서 열린 국가 대항전에 출전했습니다. 그때 난생 처음으로 해외에 나가봤습니다. 어머니는 학업에 더 열중하길 바랐는데, 국가대표가 되면서 운동을 그만두지 않게 됐어요. 실은 고교 시절에는 조선공학과로 대학을 진학하고 싶다는 생각에 가끔 월미도로 가서 외항선을 구경하곤 했어요. 하지만 정구에 집중하면서 다 잊었습니다.”

인천고 정구부의 역사는 100년이 넘은 1920년 이전부터 시작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인고 120년사’를 보면 1923년 6월17일 부내 산근정 기독청년회 코트(웃터골·현 제물포고 추정)에서 제2회 전인천 정구대회가 열렸는데, 인천고의 전신인 인천공립상업학교 학생 신태억이 우승한 것으로 기록됐다. 외과의사이자 향토사학자 신태범(1912~2001) 박사가 남긴 기록 ‘인천 한 세기’를 보면, 1920년대 인천공립상업학교 마당에 테니스 코트가 있었다고 한다. 인천의 대표적 항만기업 선광 심정구 명예회장 또한 인천고에서 정구 선수로 활약했다. 인천고의 현 소프트테니스부는 2021년 전국체전에서 우승하는 등 여전히 전통 강호로 꼽힌다.

1966년 인천고를 졸업하면서 김 감독은 국책은행을 비롯한 여러 실업팀에서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다. 그러나 팀을 선택하는 과정에서 실업팀 입단이 불발돼 이듬해 체육특기생으로 성균관대학교 신문방송학과에 입학했다. 김 감독은 성균관대에 입학하자마자 테니스로 종목을 바꿨다. 정상급 선수인 김 감독의 종목 전환 과정에서 정구협회와 테니스협회 간 갈등이 일어나기도 했다.

“정구로 국책은행 실업팀에 갈 기회가 있었지만, 더 세계적인 스포츠인 테니스로 옮기는 모험을 택하고 싶었습니다. 우리나라는 일본의 영향으로 일제강점기 주로 정구를 했기 때문에 테니스가 본격적으로 한국에 보급된 건 해방 이후입니다. 그래서 그때까지도 한국은 테니스 쪽이 많이 약했어요. 대학교 1학년 때는 걸음마 단계였고, 2학년부터 다시 성적을 내기 시작했습니다. 여전히 인천 집에서 경인전철을 타고 학교로 통학하던 시절이었습니다.”

테니스가 한국에 처음 소개된 시기는 그 기원이 명확하지 않지만 1880년대 개항기로 여겨진다. 이영호 인하대 명예교수가 2022년 한국학연구 제64집에 게재한 논문 ‘개화기 서양인의 테니스 향유’를 보면, 1883~1884년 서울 미국공사관에 최초의 테니스 코트가 조성된 이후 정동 외국인 주거지 곳곳에 테니스 코트가 마련됐다고 한다.

서울 바깥에서는 제물포(인천) 개항장에서 테니스 경기가 활발했다. 1901년 제물포 각국조계 내에 건립된 제물포구락부에 테니스 코트가 있었다고 한다. 1902년 가을에는 서울과 제물포 간 서양인들의 테니스 대회도 열렸다. 제물포 팀에는 제물포구락부를 설계한 러시아 건축가 사바틴(1860∼1921), 홈링거상회 직원 영국인 월터 베넷(1868~1944) 등 현재까지 이름이 전해지는 개항기의 유명 외국인들이 출전 명단에 포함돼 있었다. 당시 테니스는 서양인들만 즐기는 운동이었다. 일제강점기 정구가 보급된 이후 우리나라에선 테니스의 명맥이 이어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테니스 국가대표 선수·감독으로

대학 시절부터 테니스 국가대표로 발탁된 김 감독은 1971년 산업은행 테니스팀에 입단하면서 전성기를 맞는다. 김 감독은 1971년부터 1974년까지 국내 각종 주요 대회에서 우승을 거듭했다. 경기에서 이긴 기억이 대부분이다. 그 정점이었던 1973년 데이비스컵 한일전 이야기를 더 들어보자.

1973년 3월23일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데이비스컵 동부 지역 예선 경기에서 김성배(위) 선수가 일본의 카미와즈미 선수에게 백스트로크를 날리고 있다. /김성배 제공
1973년 3월23일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데이비스컵 동부 지역 예선 경기에서 김성배(위) 선수가 일본의 카미와즈미 선수에게 백스트로크를 날리고 있다. /김성배 제공

“당시 테니스광이었던 김종필 국무총리가 시구식에 나왔어요. 시구한 공이 그만 경기 중계용 카메라의 렌즈에 끼어서 관중들이 깔깔대며 웃은 기억이 납니다. 서울운동장 테니스 코트는 밑으로 움푹 들어간 구조라서 바람이 강하면 회오리바람이 불어요. 카미와즈미가 강한 바람에 휘말린 것 같았어요. 저는 홈그라운드니까 바람이 부는 방향도 알 수 있었고, 여러 모로 컨디션이 좋았습니다. 경기에서 이기니 김종필 총리가 너무 좋아했어요. 그 이후 김 총리가 테니스를 전폭적으로 지원해줘서 그해 영국 윔블던 대회 출전 기회도 얻었습니다.”

팀을 옮긴 김 감독은 전국체전에서 부산시 대표 선수로 출전하라는 소속 팀의 요구를 물리치고 팀에서 나왔다. 경기도(인천) 대표로 전국체전에서 뛰고 싶었다고 한다. 잠시 휴식기를 가진 김 감독은 1978년 1월 창단한 대우중공업(현 HD현대인프라코어) 테니스 팀에서 초대 코치(감독)를 맡아 후진 양성에 뛰어들었다. 산업은행 부총재를 지낸 심원택(1923~2010) 당시 대우중공업 사장이 김 감독을 직접 발탁했다고 한다. 김 감독은 “심원택 사장이 산업은행에 있을 때 저를 인상 깊게 봤다고 한다”며 “덕분에 고향인 인천을 연고로 둔 팀의 창단 멤버가 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김 감독은 대우중공업 테니스팀에서 차세대 선수들을 육성했다. 대우중공업은 주창남, 유진선, 김봉수 등 굵직한 선수들을 배출했다. 김 감독의 훈련이 어떠했는지는 1979년 2월2일자 조선일보의 현장 취재 기사를 통해 들여다볼 수 있다.

“대우중공업 테니스팀의 연습장인 장충 코트는 육상연습장으로 돌변했다. 코트 50 바퀴 돌기, 토끼뜀 등 옛 군대 기합 같은 동작이 되풀이되지만, 사령관인 김성배 코치의 표정은 냉담하다. 참다 못해 주전 주창남이 라켓을 들고 볼을 치게 해달라고 애원했으나 김 코치는 못 들은 체 한다. ‘정상적인 동계 훈련 방법은 라켓 없이 체력만을 단련시킨다는 것이 제 소신입니다.’”

지난달 23일 오후 인천 미추홀구 인천고등학교 백주년기념관에서 김성배 전 테니스 국가대표 감독이 국가대표로 활약하던 시절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2025.5.23 /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지난달 23일 오후 인천 미추홀구 인천고등학교 백주년기념관에서 김성배 전 테니스 국가대표 감독이 국가대표로 활약하던 시절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2025.5.23 /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국가대표로 발탁된 유진선이 1986년 서울아시안게임에 출전해 단체, 단식, 복식, 혼합 복식 등 4개 종목에서 4관왕을 차지했다. 김 감독은 그 성과 덕분에 유진선, 김봉수 등 아시안게임 메달리스트들과 함께 김우중(1936~2019) 대우그룹 회장을 만났다.

“그때는 대우 로얄즈 축구단이 굉장히 잘 나갔어요. 김우중 회장도 축구단을 무척 아꼈고요. 국내 테니스 무대에서도 대우와 현대가 경쟁하던 때입니다. 제가 김우중 회장에게 ‘우리 선수들이 자동차 한 대씩 갖고 싶다고 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김우중 회장이 유진선과 김봉수 선수에게 대우 르망 한 대씩을 선물해 테니스팀 자존심을 세워줬습니다.”

김 감독은 1987년부터 1990년까지 국가대표팀을 이끌었다. 그가 국가대표 감독으로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는 역시 1988년 서울올림픽이었다. 당시 국내에선 정상급이었지만, 세계 무대에선 랭킹 352위로 무명에 가까웠던 김봉수가 남자 단식 2회전에서 유력 메달 후보였던 세계 랭킹 12위·프랑스 1위의 앙리 르콩트를 상대로 4시간 혈투 끝에 승리를 따낸 경기였다. 서울올림픽에서 김봉수는 16강(3회전)에 진출했으며, 이 성적은 현재까지도 올림픽 남자 테니스 단식 최고 기록으로 유지되고 있다.

“제가 국가대표 감독을 맡을 때 조중건 당시 대한항공 사장이 대한테니스협회 회장이었어요. 한진그룹 조중훈(1920~2002) 회장이 인천에서 시작해 한진그룹을 한국의 대표 기업으로 성장시켰잖아요. 조중훈 회장 형제인 조중건 회장도 제가 인천 출신이라는 것을 알고 저를 더 많이 아꼈던 것 같습니다.”

김 감독은 해설가로도 이름을 날렸다. 그는 1978년 처음으로 TV 중계 방송 해설을 시작한 이후 2010년대까지 KBS 해설위원으로 활약했다. 호주, 네덜란드, 벨기에, 슬로바키아, 카타르 등 해외 원정 경기를 현지에서 중계하면서 이형택, 정현 등 한국 선수들이 세계적 선수로 성장하는 과정을 응원했다. EBS에서 테니스 강의 프로그램을 진행하기도 했다. 김 감독의 해설은 오랜 경험과 경륜을 바탕으로 한 ‘묵은 장 스타일’을 지향한다고 한다. 그는 고향 인천에 대한 생각을 경기 해설처럼 맛깔나 이야기했다.

“인천하면 할머니가 연안부두 시장에서 사서 구워 줬던 준치가 생각납니다. ‘썩어도 준치’할 때 그 준치가 맞아요. 남들은 소고기 먹고 국가대표 선수가 됐다고 하는데, 저는 주말 아침에 조깅하고 귀가할 때마다 할머니가 내어 주신 준치를 먹고 국가대표가 됐습니다. 지금도 옛 생각에 가끔 연안부두에 가서 준치를 먹습니다. 앞으로 바람이 있다면 인천에서 인천 출신 체육인들을 찾아 재조명하고 대우해주는 것이에요. 찾아 보면 인천 출신의 자랑스러운 체육인이 아주 많습니다.”

지난달 23일 오후 인천고등학교 내 교훈 ‘성실’(誠實)이 새겨진 비석 앞에 김성배 전 테니스 국가대표 감독이 서있다. 2025.5.23 /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지난달 23일 오후 인천고등학교 내 교훈 ‘성실’(誠實)이 새겨진 비석 앞에 김성배 전 테니스 국가대표 감독이 서있다. 2025.5.23 /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 약력

1948년 인천 출생

1960년 인천송림초등학교 졸업

1963년 상인천중학교 졸업

1966년 인천고등학교(65회) 졸업

1971년 성균관대 신문방송학과 졸업

1971~1975년 산업은행 테니스팀

1978~2002년 대우중공업 테니스팀 감독

1987~1990년 국가대표 테니스팀 감독

1978~2016년 KBS 해설위원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