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방이 잘 된 극장안에서 공포영화를 즐기는 것이 이젠 여름피서의 하나가 됐다. 여름 특수를 위해 영화제작자들은 공포영화를 앞다퉈 제작한다. 재수만 좋다면 적은 비용을 통해 대박을 터뜨릴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시내 극장가에 상영중인 공포 영화만해도 10여편에 이른다. 모두 수요와 공급의 법칙에 따른 경제논리다. 공포영화 제작자들의 한결같은 마음은 예술성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공통점이 있다. 오직 관객에게 극도의 공포감을 주는 것에 만족한다. 극중의 출연인물들을 얼마나 많이, 얼마나 잔인하게 죽이느냐는 것이 그들의 목적이다.
사회학자들의 끊임없는 관사중의 하나는 '영화가 우리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다. 영화가 아무리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하나라지만 어두운 공간에서의 두시간동안의 대리체험은 분명 관객들에게 영향을 미칠거라는 것이 그들의 한결같은 주장이다. 미국의 경우 섹스영화보다 공포영화에 매기는 관람등급 평가가 지나치게 까다로운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다. 존 맥노튼 감독의 데뷔작이었던 '헨리:연쇄살인범의 초상'이 그 경우다. 미국에서 실제 존재했던 헨리 루 루카스라는 연쇄살인범을 다룬 이영화는 상영 당시 큰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영화의 잔인함은 차치하고 주인공 헨리의 심리묘사가 지나치게 리얼하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우리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화성연쇄살인사건을 주제로 만든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도 개봉 당시 논란이 있었다. 연쇄살인범에 대한 향수를 불러 일으켰기 때문이다.
이런 유의 영화를 두고 논란을 벌이는 것은 '모방범죄'의 우려 때문이다. 누구를 흉내내고 싶어하는 것은 사람들이 갖고 있는 욕망이다. 인기드라마 주인공의 헤어스타일과 행동이 유행이 되는 것은 그런 '모방적 행위' 때문이다. '공포영화', 특히 연쇄살인범을 주제로 하는 영화가 우리 사회에 영향을 미친다는 논리가 설득력을 갖는 것은 그래서 당연하다.
11개월간 무려 20명을 살해한 연쇄살인범이 잡혔다. 사회는 극도의 충격속에 빠졌다. 언론은 살인범이 불우한 환경에서 자랐고 정신질환을 앓고 있다고 앞다퉈 보도한다. 하지만 어쩐지 그 논리가 빈약하다. 이혼율이 세계 최고를 자랑(?)하는 대한민국. 불우한 환경을 갖고 사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얼마나 많은가. 언론은 한발 더 앞서 '부자가 싫었다. 여자가 싫었다' '아이큐 140' 이라는 헤드라인을 뽑았다. 심지어 '서울판 살인의 추억'이라는 낭만적 제목을 달기도 했다. 몸에 소름이 돋는다. 마침내 상상하기도 싫었던 연쇄살인범 유영철 팬카페가 생겼다.
살인의 추억이라고? 먹고 살려고 발버둥치는 힘없는 여자 마사지사 11명을 토막내 살해하고 저항 한 번 제대로 못하는 노인을 살해한 천인공노할 살해범을 두고 살인의 추억이라고? 지금 우리 사회는 무언가 딱 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정체성을 상실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모두 다 우왕좌왕하고 있다. 이런 끔직한 사건도 어수선한 사회분위기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가만히 들여다 보면 우리 사회는 건강하지 못한 사회다. 윤리도 도덕도 사라진 '병든 사회'다.
그래서 이런 사건과 이를 다루는 언론 때문에 모방범죄가 생길까 무섭다. 그저 막연한 증오심때문에 그토록 많은 사람을 살해한 희대의 살인마 팬카페가 생길 정도면 모방범죄가 생기지 말라는 법도 없다. 어떻게 이지경까지 이르렀는가. 세기말적인 암울한 분위기가 왜 이 시점에서 연출되고 있는가. 사안 사안마다 국론이 분열되고 서로가 서로를 못 잡아 먹어 안달이고 희대의 살인마가 '부자가 싫었다'라고 한 말 한마디 때문에 동정여론이 일어나는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 /이영재(경제부장)
'살인의 추억'이라고?
입력 2004-07-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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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7-20 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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