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 2천43만, 40년 2천354만, 45년 2천500만. 일제 식민지의 우리 인구 중 과연 친일파는 몇%나 됐을까. 엄밀, 엄격히 말해 충정공 민영환(閔泳煥)이나 매천 황현(黃玹) 등처럼 자살을 했거나 면암 최익현(崔益鉉)처럼 굶어죽은 이들을 제외한 99.99%가 친일파였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이 땅을 침탈, 유린한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죽도록’ 싫어 순도(純度) 100%의 애국심을 고이 간직하려 했다면 앞의 애국지사들처럼 자결하는 길밖에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그렇지 못하고, 망국의 분노와 식민지 백성의 서러움을 못 이겨 땅을 치는 통곡 끝에 자결하지 못한 사람, 불구대천(不俱戴天)의 침탈 원수들과 도저히 하늘을 함께 이지 못한다며 하늘로 치솟거나 땅으로 꺼져들지 못한 사람, 그래서 침략 원수들과 함께 이 땅의 신성한 공기를 나눠 마시며 구명도생(苟命圖生), 구차한 목숨을 부지해야만 했던 모든 식민지 백성이 어쩔 수 없는 친일파가 아니고 무엇인가.
물론 반민족적인 색깔로 매국에 앞장섰던 이른바 ‘을사 오적(五賊)’을 비롯해 유달리 친일 행적을 드날린 이들도 없지는 않았고 일제의 ‘조선공로자명감(朝鮮功勞者銘鑑)’에 적힌 353명도 간과할 수 없을지 모른다. ‘오오 폐하의 고굉(股肱→팔다리)이여!…’ 등 낯뜨거운 향(向) 천황 용비어천가와 일제 찬가를 읊은 친일 문필가도 있긴 있었다. 그러나 그들 유약한 선비들이 자살로 항거하지 못하는 한 일제의 강권(强勸)과 협박, 회유를 피할 수는 없었다. 거의 모두가 창씨개명을 할 수밖에 없었고 목구멍 보전을 위해 ‘와레와레와 고고쿠신민나리(우리는 皇國臣民이다)…’로 시작되는 일제 찬양 주문(呪文)을 낭랑하게 외울 수밖에 없었다. 그걸 외워야 배급을 타 먹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식민지 ‘신민(천황의 백성)’은 참새 발바닥에 묻은 피가 더 진하냐 제비 발등에 묻힌 피가 더 오염됐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 죽지 못해 친일파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일본어를 쓰지 않으면 교육을 받을 수 없던 모든 ‘생도(학생)’가 친일파일 수밖에 없었고 징병 또는 징용으로 끌려가 입만 열면 ‘덴노헤이카 반사이(천황폐하 만세)’를 절규해야만 했던 시게미쓰구니오(重光國雄) 고초(伍長→하사) 열린우리당 신기남 당의장 부친 등도 자의는 아니었을 것이다. 아니, 일제가 창설한 학교를 다니고 그들이 닦고 건설한 도로와 철도를 이용하고 그들이 세운 일제 건축물을 아직도 사용하는 우리 모두가 친일파 후예가 아니고 무엇인가. 그런데 일제 때 태어나지도 않은 세대들이 도대체 무슨 안목으로 누구를 친일파로 가려낸다는 것이며 이미 60년 이전의 백골이 진토된 고인들을 깨워 무엇을 어찌하겠다는 것인지 자다가도 모를 일이다. 부관참시(剖棺斬屍)라도 하고 앙상한 유골들에게 매질이라도 하겠다는 것인가.
어느 나라 역사가 그리 왜곡, 굴절됐다 하더라도 식민지 ‘분자(分子)’들을 뒤늦게 감별, 매도했다는 예는 듣지 못했다. 1776년 독립한 미국은 친영파(親英派)를 단죄치 않았고 190년간의 식민지로부터 1947년 독립한 인도 역시 친영파를 어찌했다는 얘기는 듣지 못했다. 호주, 뉴질랜드, 캐나다,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등 41개 영국 식민지였던 나라는 어떠했고 여러 나라 식민지를 거친 타이완과 여타 식민지 경험국은 어떠했던가. 그들 나라 대통령과 총리의 애국심이 희박하고 머리가 덜 떨어져 그랬던 건 아니다. 과거 지향의 국력 소모와 국민 분열을 염려했기 때문이었고 보다 중요한 현재에 매진, 미래로 나아가기 위함이었다. 더구나 지금 우리에겐 과거에 매달려 허송할 겨를이 없다. 그리고 역사는 역사다. 누구도 정확히 역사를 해석, 토를 달긴 어려운 법이다./吳東煥(논설위원)
2,500만의 99.99%가 친일파였다
입력 2004-08-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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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8-18 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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