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재성이 쓴 소설 '경성 트로이카'를 읽다가 '이럴 수가…' 싶은 대목을 만났다. 2차 트로이카가 와해된 후 이재유(李載裕)가 이관술(李觀述)과 함께 양주 공덕리(현 서울 노원구 창동)에 은신하면서 조악한 등사기로 찍어낸 잡지의 내용이다. 동지들과의 연락선이 완전히 끊어진 상태에서 이재유는 자신의 현장경험과 상상력만으로 당대 노동자들이 쟁취해야 할 목표를 제시했다. 의료보험과 국민연금의 실시, 출판과 집회의 자유, 동일노동에 동일임금, 주5일제와 같은 의미가 되는 주당 40시간 노동제, 최저임금제….
놀랍다. 이재유가 잡지를 낸 시점이 1936년 10월 중순이니, 그는 무려 60~70년이나 시대를 앞서가는 꿈을 꾸고 있었던 것이다. 철저한 사회주의자였던 그의 꿈은 비록 '당대'는 아니지만 먼 훗날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에서 모두 합법화되어 있지 않은가.
다시 찬찬히 생각해 보면, 시대를 '선취'한 부분은 새삼스러운 게 아닐 수도 있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유와 권리 가운데 피의 역사를 갖지 않은 게 있던가. 생각나는 대로 간단한 예를 들어보자. 지금은 누구나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여성 참정권을 쟁취하기 위해 1913년 영국의 운동가 에밀리 와일링 데이비슨은 경마장의 달리는 말 사이로 뛰어들어 목숨을 내던졌다. 1886년 시카고 헤이마켓에서는 8시간 노동제를 주장하던 시위행렬에 폭탄이 날라들고, 이와 관련해 4명이 교수형에 처해졌다. 메이데이(5월1일)는 바로 이 사건을 기념하는 날이다.
그러므로 이재유가 정말 빛나는 부분은 '선취'도 '선취'려니와, '꿈'을 잃지 않았다는 사실 그 자체에 있지 않을까. 1936년이면 일본 제국주의가 만주사변을 지난 중일전쟁으로 치닫던 절망의 시대였다. 국내 민족주의 계열의 독립운동은 이미 명맥이 끊긴 상태였고, 사회주의자 일부만 간신히 지하투쟁을 이어가고 있었다. 이런 극한 상황에서도 사람다운 삶의 조건을 구체적으로 꿈꾸는 '후테이센징(不逞鮮人)'이 살아 있었다는 사실은 얼마나 희망적인가.
얘기가 좌파 '후테이센징' 쪽으로 흘렀지만, 그렇다고 우파 불령선인의 꿈이 완전히 꺼져버린 것은 아니다. 국내 민족주의자들은 이후 대부분 변절의 길을 걸었으나, 임시정부만은 아무리 어려운 시절에도 독립의 꿈을 잃지 않았다. 학병을 탈출해 합류한 장준하(張俊河)가 '폭격해 버리고 싶다'고 일갈할만큼 분열되고 초라한 정부였을망정, 해방조국과 새 삶의 비전을 어떻게든 끌어안았다. 대한민국 헌법이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못박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임정을 지탱한 우파 '후테이센징'들은 어떤 세상을 꿈꾸었는가. 41년에 나온 임정의 건국강령, 44년에 선포된 임정의 헌법인 임시헌장 등을 읽어 보면, 민족정기가 살아있고 수탈과 착취가 없는 생산자들의 민주사회를 건설해야 한다는 뜻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백성이 주인되는 나라'를 위해 일단 모든 토지와 대산업수단을 국유화하며, 이를 운용할 기본 방침까지 제시된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물론이고, 해방 직후 통치세력이 질겁을 할만큼 불온한 내용 아닌가. 그 법통을 잇고 있다는 국가 '대한민국' 보통국민은 그런 사실(史實)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
좌건, 우건 '후테이센징'들은 그때도 지금도 결코 승리자가 아니다. 하지만, 승자의 역사도 그들의 가슴에서 보석처럼 빛났던 꿈마저 언제까지나 짓밟고 무시할 수는 없었다. '우리에게 몽상이 문제였다면, 그것은 아마도 지나쳐서가 아니라 부족해서였을 것'이라는 어느 철학자의 진단은 그래서 더욱 가슴을 울린다. /양훈도(논설위원)
불령선인의 꿈
입력 2004-09-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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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9-08 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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