헷갈리는 말이 난무한다. 가장 최근에 들은 모순된 표현은 '12월의 열대야'다. 어느 방송국 드라마 제목이라고 했다. 뭐야? 누굴 놀리나? 서민들은 겨울나기가 한 걱정인 판에 열대야라고? 엄동설한에도 벌거벗다시피 사는 인종들이 벌이는 그렇고 그런 사랑놀음 아냐? 그러나, 전혀 동이 닿지 않는 말들을 갖다붙여 은유와 상징을 만들어내는 기법에 과민반응을 보이는 건 비웃음을 자초하는 일이 될 터.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처럼 잘 빠진 사랑얘기가 되는지나 국으로 지켜보는 게 상수다.
 
그러나 '우익혁명'이라는 말은 여전히 얼떨떨하다. 지난 2000년 당시 부시 진영이 클린턴에 맞서 내세웠던 구호 중에 하나가 '우익혁명'이다. 그가 올 대선에서 승리하자 우익혁명의 승리 운운하는 기묘한 표현이 다시 고개를 내밀었다. 세상에! 우익도 혁명을 한다고? 구체제(앙시앙 레짐)를 지키고, 기존질서 유지(스테이터스 쿠오)를 추구하는 세력에게 붙여진 전통적인 이름이 우익 아니었던가? 우익이 하는 건 '친위쿠데타'라고 불러야 하는 거 아니야? 세상이 뒤죽박죽이 된 거야, 내가 처음부터 뭘 잘못 배웠던 거야?
 
곧이어 '수구적 좌파'라는 표현도 등장했다. 이것도 상식을 심하게 흔든다. '적'자가 붙기는 했지만, 옛 것 지키려고 안달하는 세력이 어째서 계속 좌파라고 불릴 수 있지? '우익혁명'식 조어법과 쌍생아 아냐? 물론, 스탈린처럼 체제방어적 정권에 대해 그런 지칭이 성립할 여지는 있다. 그러나, 우리의 형편이 과연 그런 걸까? 혼란스럽다.
 
하지만 '우익혁명'이나 '수구적 좌파'는 그런대로 이해할 만하다. 밑바닥에 깔린 정치적 의도를 감안하고, 뒤집힌 상식을 다시 이리저리 엮으면 된다. 그래도 안 되면 헛심 쓸 필요 없이 그런 말이 있나보다 하고 살면 그만이다. 하지만, '자본의 태업'이라는 표현만은 호락호락 넘어갈 수 없다. 우리네 살림살이에 막대한 영향을 직격탄으로 미치기 때문이다.
 
누가 갖다붙인 말인지는 모르겠으나, 한국사회에 '자본의 태업', 심하게는 '자본의 파업'이라는 말이 등장한 지는 꽤 됐다. 현 정권이 들어선 직후부터는 그런 말이 공공연하게 떠돌았다. 요컨대, 정부가 개혁을 빙자해 '반기업적' '반시장적' 정책을 밀어붙이기 때문에 돈(자본)을 가진 부자(기업)들이 돈주머니를 꽁꽁 졸라매고 풀어놓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실일까?
 
엄밀히 말해, '자본의 태업'은 성립하기 힘든 모순된 표현이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은 본질적으로 태업과는 거리가 먼 운명이기 때문이다. 자본은 돌고돌아 이윤을 남기지 못하는 한 자본이 아니다. 자본에는 눈도 없고, 국적도 없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잠시 숨을 고를 수야 있겠지만, 쉬지 않고 페달을 저어야 쓰러지지 않는 자전거처럼 끝없이 회전해야 살아남는다. 국내에서 길이 막히면 해외로라도 흘러나가게 되어 있는 게 자본이다. 파업하고 태업할 짬이 없다. 이는 자본주의의 역사가 증명하는 바다.
 
그러나, 한국의 사정은 어떤가. 정부·여당도, 야당도, 기업도, 국민도 '자본의 태업'을 명백한 현실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국내 최대 재벌은 수십조원에 이르는 여유자금이 있으면서도 돈줄을 꽉 묶었다는 소문이 나돈다. 총리조차 “부자들이 돈을 쓰게 할 특효처방이 있으면 스승으로 모시겠다”고 고백하고 나섰다. 보통국민도 둘만 모이면 IMF 때보다 더 어렵다고,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쉰다.
 
그러면, 도대체 어떡해야 하는 걸까. 전공노에 강력히 대처했듯이 국민생활을 볼모로 태업에 돌입한 자본 역시 강수로 다스려야 하는가, 아니면 '백기항복'을 하고 자본이 요구하는대로 다 들어줘야 하는가. 태업할만한 자본도 없는 국민은 허탈하고 답답해서 잠이 안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