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작년 초겨울 금강산 구룡연코스를 혼자 내려온 적이 있다. 상팔담까지는 도저히 자신이 없어 중간에서 되돌아선 참이었다. 하늘이 녹수 위로 내려앉은 계곡을 따라 푹신한 낙엽 양탄자를 밟으며 호젓하게 홀로 걷는 기분이 각별했다. 이렇게 금강산을 밟는 남쪽 사람이 500만명을 넘어서면 통일이 이뤄지지 않을까. 밑도끝도 없는 '싸구려 감상'까지 밀려온 건 아마도 쭉쭉 뻗은 금강송 사이로 부는 바람이 여간 상쾌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현대그룹 현정은 회장이 승부수를 던졌다. '국민 여러분께서 비리 경영인의 인사조치가 잘못 된 것이라고 한다면 이 시점에서 저는 비굴한 이익보다 양심을 선택하겠습니다'. 밤하늘 별과 달을 보며 썼다는 현 회장의 '국민 여러분께'는 사뭇 비장하다. 그렇구나. 금강산 관광은 북한과 현대아산이 벌이는, 냉엄한 통일 비즈니스였구나. 새삼스러운 자각이 머리를 친다.

 현대-북한의 거래에서 비즈니스 성격이 도드라지지 않은 까닭은 시작이 극적이었기 때문이다. 고 정주영 회장이 소떼 방북을 한 것부터가 '역사적인 사건'이었기에, 양자의 거래는 사업이라기보다 통일을 향한 진전으로 평가됐다. 4천만달러 송금이 뒤늦게 불거졌어도 그건 당시 정권과 야당의 정치싸움 성격이 강했지 비즈니스 자체가 부각되지는 않았다. 퍼주기니 통일쇼니 하는 비난과 전 회장의 자살 등 숱한 곡절을 겪기는 했어도 현대와 북한의 사업 파트너십은 꾸준히 전진할 수 있었다. 일단 불이 댕겨진 남북의 통일열망이 그 정도는 태워버린 탓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상황이 달라졌다. 김윤규 부회장 퇴진시킴으로 시작된 현대와 북한의 줄다리기는 양쪽이 전형적인 비즈니스 관계임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물론, 일반인들로서는 그 이면의 비밀을 알 수 없다. 아니, 알 필요도 없다. 잘린 부회장의 비리가 도대체 무엇인지 궁금하기는 하지만 그건 그룹 내부 사정이다. 흘러나온 소문만으로 보자면 그만 일로 대북사업 성사와 진전에 지대한 공헌이 있는 인물을 물러나게 했다는 게 의아하지만, 어쨌거나 남의 회사 인사까지 감놔라 배놔라 할 일은 아니다.

 남쪽 사람들이 가장 의아해 하는 점은 북이 왜 이리 예민하게 나오는가 하는 점일 터이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해못할 바도 아니다. 자신과 얘기가 통하고 배짱이 맞는 협상창구를 바꾸지 말라고 상대 회사에 압력을 넣는 일은 비즈니스 세계에서는 비일비재하다. 물론, 통일이라는 명분이 걸린 사업을 이렇듯 벌거벗은 거래관계로 격하시킨 행태는 온당하다고 할 수 없다. 더구나 북한은 금강산 구경 한번 해보겠다는 평범한 사람들의 소망을 볼모로 칼자루를 휘두르는 격이다.

 마침, 북측이 롯데관광에 개성관광사업을 제안한 사실도 확인됐다. 현대에 압력을 가하는 한편으로 다른 회사에 손짓을 했다는 얘기다. 자본주의 남한 기업 찜쪄먹는 비즈니스 수법이라 할만하다. 하기는 북한의 협상력은 자타가 인정한다. 서방언론이 이름붙인 '벼랑끝전술'이 대표적인 예다. 북은 세계최강 미국을 상대로 있는 지 없는 지 확인도 안된 몇 기의 핵을 앞세워 협상주도권을 쥐어나가는 면모를 보여왔다. 구체적인 실행단계에서 미국이 건건이 제동을 거는 바람에 실익을 챙기기엔 어려움이 있지만 적어도 협상과정에서는 당당하고 수준높은 전술을 구사한다는 인상을 준다.

 그나저나 현대와 북한의 한판승부는 과연 어떻게 결론이 날까. 현 회장이 달을 보며 간절히 빌었던대로, 김 부회장을 복귀시키기 않고도 미래의 대북사업 선점·독점권을 유지해 나갈 지, 아니면 아쉬울 것 없는 북한의 의도대로 한발 물러설 지 여간 궁금하지 않다. 그러나 대북사업에 정통하지 못한 우리네 좁은 소견으로는 현대와 북한이 겨레를 감동시켰던 초심으로 돌아가 통크게 놀아주기를 바랄 뿐이다. /양훈도(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