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방 속에 책이 들어 있나요?” 인천공항 검색대 여직원이 물었다. “예, 평양에서 몇 권 샀습니다.” 남직원이 푸른색 띠로 가방을 묶었다. 작은 갈색 여행가방이 죄없이 포승줄을 받았다. 불현듯 20여년전 대학시절이 떠올랐다. 멀찍이 전경이 보이면 괜히 가슴이 두근거렸지. 혹시 무심코 가방에 집어넣은 책이 불온서적으로 몰릴지 몰라서…. 그 땐 이런 책이 들어 있었더라면 영락없이 가방이 아니라 내가 닭장차에 태워졌을 터이다.
자료 욕심이 화근이었다. 지난 15일 아리랑 참관단 숙소인 양각도 호텔에 들어서자 식당 앞 서점이 눈에 띄었다. 남쪽의 동네서점도 여기보다는 책이 많으리라. 조악하게 인쇄된 책들은 해방 직후 출판물을 연상시켰다. 그래도 서가를 훑으며 '문제 없는 책'만 골랐다. 민속 어학 문학서적 위주로. '북한 출판물·CD 무차별 반입'을 대서특필한 어느 신문의 보도가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 아니다. 사상 이념 선전물은 전문가나 볼 책 아니던가. 흥미도 없는 책을 아까운 유로화 주고 사고픈 생각은 전혀 없었다.
'민요 따라 삼천리', '조선의 사계절 민속', '조선어맞춤법편람'…. 18권이나 된다. 그래도 쪽수가 적고, 재생종이로 된 책이라 가볍다. 남쪽 책이라면 무거워서라도 가져갈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것이다. 5유로짜리 '아리랑' CD는 사지 않았다. 내 눈으로 직접 관람한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판단했다.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세관신고서에 '국헌을 문란시킬 만한 책자'를 소지하지 않았다고 자신있게 표시했다. 나는 남북의 민속과 언어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직접 확인해 보고 싶었을 뿐이다.
일행은 다 빠져 나갔다. 북한그림과 농산물을 보따리로 샀던 이들도 무사통과였다. 세관에 잡힌 건 나와 아리랑CD가 걸린 50대 남자 달랑 둘이다. 양각도에서 책을 사던 사람이 꽤 많았는데, 이상하다. 이른바 선별검사다. 아예 책이 없다고 잡아뗐더라면 보내 주었을까. 내가 그렇게 불온하게 생겼나. 쓴웃음이 나왔다. 다행히 세관직원들은 친절했다. 자신들은 판단할 권한이 없다며 양해를 구했다. 통일부에서 반입승인을 받아오면 돌려준다며 증서를 써주었다.
올 한해만 방북자가 10만명으로 추산된다. 아리랑참관단도 최소 7천명 이상이라고 한다. 개성 평양 묘향산 백두산 길이 열리면 그 수는 급격히 늘어날 것이다. 이들의 왕래를 왜 허용하는가. 이렇게라도 교류협력을 확대해야 통일의 물꼬가 커진다고 믿기 때문 아닌가. '국헌문란'의 가능성을 엄격하게 해석하면, 이념성 없는 책 몇 권보다 아리랑참관을 포함한 방북 자체가 훨씬 큰 문제 아닌가.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은 웃음에 관한 책을 지키기 위해 연쇄살인을 저지르는 수도사를 그리고 있다. 지금이 중세인가. 좋다. 아직은 활자의 위력을 무시할 수 없다고 하자. 그래서 교묘하게 '김일성주의'를 녹여낸 일반자료를 읽고 남쪽 우매한 독자들이 열렬한 주사파로 변할 가능성도 있다고 치자. 그건, '주체의 나라'에서 '수령님 은혜'로 잘 자란 고사리를 먹으며 주사파가 될 비율과 비슷하지 않을까. 대한민국이 그걸 걱정할 정도로 허약한가.
'현존하는 명백한 위험'이 없는 사상과 행위는 모두 허용돼야 한다. 그게 자유민주주의 '국헌'이다. 설령 '찻잔 속 태풍'에도 국가 정체성을 걱정하는 우국지사(?)들이 엄존하더라도 말이다. 물론 마찰을 피해가기 위해 정말 북한자료 반입규정을 당분간 유지할 수밖에 없을 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공항세관 전산망에 금지자료 목록을 올려놓으면 될 것 아닌가. 어차피 돌려줄 거 시간 새기고 헛돈 써가며 통일부 가서 승인받고 다시 인천공항으로 찾으러가는 불편이나 없게 말이다. 그나저나, 내 책은 언제 찾으러 간다? /양 훈 도 (논설위원)
내 책 돌리도!
입력 2005-10-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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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0-19 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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