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니페스토는 과연 성공했는가? 5·31 지방선거를 정책선거로 만들자고 등장한 게 매니페스토, 즉 참공약 선택 운동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정책선거의 염원은 '정권심판 바람', '피습 바람'에 가볍게 날려가 버리고 말았다. 왜? 우리는 그 답을 냉철하게 찾아봐야 한다. 한국정치와 자치를 이처럼 바람 앞에 무기력한 존재로 방치하면 민주주의의 위기는 깊어질 수밖에 없다.

매니페스토를 주도했던 입장에서는 이런 논리를 인정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분명 진일보했다. 정책선거의 중요성을 전 사회적으로 환기시켰다. 정책 평가·검증 기준과 절차를 마련하느라 고생도 했다. 일부 공약(空約)을 걸러내는 효과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기여는 거기까지였다. 매니페스토가 정작 목표했던 정책대결을 통한 선거풍토를 만드는데는 실패한 것이다.

단적인 예가 '조상의 빛난 얼' 덕분에 당선된 기초의원들이다. 경기도의 경우 한나라당 가 번을 받은 후보 가운데 낙선된 사례가 거의 없다. 공약이고 정책이고 따져볼 것도 없이 무조건 첫 번째를 찍은 유권자가 많았다는 뜻이다. 가나다 순에 의해 순서가 정해진 한나라당 공천자는 '가문의 음덕'을 톡톡히 입었다. 경기도지사도 공약평가단이 선정한 베스트 10에 단 한 건의 정책도 선정되지 못한 후보가 당선됐다.

물론 이런 결과는 매니페스토 운동이 전적으로 책임져야 할 몫이 분명 아니다. 낮은 투표율, 정치권이 무리하게 도입한 기초의원 정당공천제, 이미 일찌감치 대세가 판가름났던 선거분위기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매니페스토 운동이 그 어느 하나의 흐름도 정책선거로 돌려놓는데 기여하지 못했다는 점은 인정해야 한다.

사실, 매니페스토는 도입초기부터 약간의 논란이 있었다. 하지만 우리도 인신공격, 낙천·낙선 운동, 이미지·슬로건 선거에서 벗어나 정책으로 승부하는 '멋진' 선거풍토로 가보자는 대의명분이 이의제기를 원천봉쇄했다. 그러나 이제 와 돌이켜보면 명실상부한 정책선거 방법론을 어떻게 찾을 것인가에 더 깊은 고민이 있었어야 했다.

유권자는 바쁘다. 공약을 일일이 따져보고 비교할 겨를이 있는 유권자는 흔치 않다. 설사 시간이 있더라도 그 복잡한 정책공약들을 검증할만한 정보를 갖추기도 현실적으로 어렵다. 이런 유권자들에게 공약도 안 따져보고 선택을 하면 안된다고 다그칠 수 있을까. 이는 정책선거가 안되는 책임을 먹고살기 바쁜 유권자에게 떠넘기는 무책임한 일이다.

매니페스토 운동은 이를 따져볼 객관적 기준과 절차를 만들어 제시하고 널리 알리면 된다고 본 듯하다. 얼핏 그럴싸하지만 곰곰 따져보면 순진한 발상이다. 함정은 '객관적'이라는 표현에 있다. 정치는 서로 다른 가치관과 비전이 충돌하는 마당이다. 민주주의의 다원성은 서로 다른 가치관 중에서 유권자들이 자유롭게 선택을 할 수 있을 때 보장된다. 이렇듯 다양한 가치를 과연 단일한 객관적 척도로 측정할 수 있을까.

자칫하면 정책의 잣대로는 잴 수 없는 대안정치적 가치들이 아예 무시·배제될 가능성이 있다. 침대 길이에 맞춰 사람의 다리를 잘라내거나 잡아늘리는 프로크루스테스의 횡포가 나타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를 피하려면 다양한 검증 주체가 나설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되면 매니페스토는 참공약 선택이 아니라, 참공약 지지운동이 된다.

매니페스토 주체들은 이제 당선자들의 공약검증 단계가 남았다고 한다. 그러면 그 정책에 처음부터 반대했던 유권자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자신이 지지하지도 않은 공약을 빨리 이행하라고 촉구하는 자기모순에 빠져야 하나.
정책선거를 하지 말자거나 매니페스토를 비난하자는 게 아니다. 다만 진정으로 한국의 정치와 자치가 성숙하기를 원했다면 어떻게 했어야 했는지 뼈저린 반성을 해보자는 것이다.

/양 훈 도(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