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만강은 중국 도문(圖門)을 끼고 흐르면서 한반도의 북단을 크게 휘감아돌아 곧바로 동해바다로 향해 흐른다.
한민족의 과거와 현재를 관통하며 숱한 격랑을 헤쳐 돌아나온 강물은 긴 여정의 막바지에 한(恨)의 용트림을 친다.
그래서 도문_훈춘(琿春)간 도훈대로(圖琿大路)와 나란히 달리는 강물의 애닯음은 온갖 풍상속에 피어난 한떨기 난초의 자태마냥 고고하게 느껴진다.
도훈대로를 더 내달려 가면 북한과 중국, 러시아 3국의 국경이 교차하는 곳에 위치한 훈춘시가 모습을 드러낸다.
유엔의 두만강개발계획이 만든 「황금삼각」의 중국쪽 대표도시답게 도시초입부터 발전용량 60만kw의 대형 화력발전소가 위용을 자랑하고 갓 지어진 공장굴뚝들이 뿌연 연기들을 내뿜으며 개방의 물결을 타고 나날이 변모해가는 중국의 활력있는 모습을 잘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이처럼 신개발지로 변화하고 있는 훈춘시이건만 한인(韓人)들에게만큼은 일제에 단호히 항거했던 거센 기개와 함께 시리도록 아픈 역사의 면면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1919년 용정에서 분출한 3.13만세시위가 번져 같은해 3.20일 거사를 일으켰던 곳 훈춘.
이날 새벽 6시부터 집집마다 태극기를 계양하고 상가는 모두 철시한 채 수천명의 조선인들이 군중으로 모여 훈춘 동문에서부터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던 이 항일의 도시에는 이같은 만세의 함성보다는 이듬해 일어난 「훈춘사건」과 연이은 「경신대학살」로 무참하게 죽어간 동포들의 원혼이 더욱 짙게 베어있었다.
한창 개발중인 훈춘 신안가(新安街)한쪽편으로 4층의 훈춘시공안국 건물이 나타난다.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에서는 공안(公安)이라는 단어자체가 법과 권력의 상징으로 모든 중국인들이 경계하고 조심스러워 하는 이유가 있어서 이기도 했지만 이 건물에서는 활기넘치는 훈춘시와는 사뭇 다른 포악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이곳은 바로 1920년부터 수천명의 재만(在滿)동포들을 살상한 전대미문의 「경신대학살」을 자행하기위해 일제가 그 빌미로 「훈춘사건」을 꾸몄던 일본영사분관이 있었던 자리이기 때문이다.
일부건물이나 담벼락등은 당시 건물그대로 남아 여전히 일제의 반인륜적이고 흉포한 모습을 전해주고 있다.
1919년 한반도와 중국에서의 만세시위로 당혹해하던 일제는 1920년 6월 봉오동전투에서 홍범도(洪範道)장군 휘하의 독립군에게 여지없는 참패를 당한다.
천하무적이라고 떠벌리던 「황군」의 체면이 무참히 파괴되자 일본군은 중국 동북지역의 독립군을 소탕하기 위해 조선주둔군, 동북의 관동군, 시베리아파견군을 동만주일대로 진주시킬 구실을 찾아야 했고 곧이어 천인공노할 계략과 음모를 꾸민다.
1920년 9월12일 일제는 훈춘 일대 둥지를 틀고 있던 중국인 토비 유사해(劉四海), 만순(萬順)등을 매수해 훈춘현을 공격하게 함으로써 1차 훈춘사건을 일으킨다.
이날 3백_4백명의 마적들은 훈춘을 습격, 먼저 변방초소에 불을 지른후 세무국, 전보국을 차례로 쳐들어가 노략질을 해댔다.
이날 습격으로 조선인 30여명이 살상을 당한 것을 비롯, 한족(漢族)들이 피해를 입었으나 일본거류민들의 피해는 전혀 없었다.
이 사건을 조선인 무장단체의 소행이라고 몰아부치려던 일제는 정작 일본거류민들의 피해가 전혀 없자 출병(出兵)의 근거를 잃고 말았다.
일제는 같은해 10월2일 마적단을 또다시 매수해 일본측의 생명과 재산에도 피해를 가하도록 하는 2차 훈춘사건을 조작해낸다.
진동(鎭東)을 두목으로 하는 마적단 4백여명은 기관총 2대, 양대총 10여자루, 대포 1문을 가지고 와서 두패로 나누어 상점들을 약탈하는 한편 일본영사관 분관도 분탕질했다.
마적들은 이를 방어하는 중국군 60명과 조선인 7명을 살해했으며 영사분관에서 숙직하는 일본경찰과 가족 11명도 살해하고 분관에 불을 질렀다.
그러나 경찰관사 이외에 여타 관사들은 모두 텅텅 비어 다른 피해는 없었다.
간교하게도 일제는 다른 관원들을 감쪽같이 피신시킨 것이다.
이렇듯 일본군은 자신들의 동족을 무참히 살상하면서까지 만주에 사는 일본 거류민들의 생명과 재산보호가 필요하다는 명분을 얻어 냈다.
그 불법행위를 정당화하기위해 만주거류민회에서 자기들의 보호를 요청하는 청원서를 본국에 급송하게 했다. 일본군은 그날부터 병력을 만주땅에 투입시키기 시작했다.
만주출병을 위해 일제는 훈춘사건 두달반전인 7월17일에 작성해 놓은 「간도지방 불령선인 초토계획」을 행동으로 옮기게 된 것이다.
훈춘사건을 빌미삼아 일본군 제19사단은 도문강 방면으로부터, 시베리아에 출병했던 제14사단은 훈춘방면으로부터, 관동군은 하얼빈과 심양으로부터 연변의 조선족 집단거주지로 모여들며 조선인학살을 감행했다. 이른바 「경신대학살」
[만주항일투쟁 현장답사-14] 『日帝계략』 훈춘사건과 경신대학살
입력 1999-04-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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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04-09 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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