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팀이 우수리스크에 도착한 것은 바이칼호의 도시 이르쿠츠크를 떠난 지 닷새만이었다. 이르쿠츠크에서 새벽 5시에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스바보드니까지 꼬박 48시간, 스바보드니의 독립운동 자취를 낮동안 둘러보고 다시 밤열차를 타고 하바로프스크까지 14시간, 하바로프스크 시내를 돌아다니다가 저녁 8시에 떠나는 기차를 타고 우수리스크역까지 11시간을 달렸다. 열차에서 내린 뒤에도 한참동안 덜컹대는 듯한 느낌이 가시지 않았다. 몸과 마음을 추스려 시 중심가에 있는 한인관련 유적을 몇 곳 둘러본 뒤 수이푼강으로 향했다.

우수리스크 시내를 벗어나 중·러 국경으로 뻗은 길에 들어서자마자 수이푼강의 자락을 만날 수 있었다. 강은 이천의 청미천만 했다. 수이푼의 중국식 이름은 수분하(綏芬河), 러시아에서는 현재 라즈돌노예강이라 불린다. 북만주에서 발원한 강은 남쪽으로 물길을 잡아 동해 바다 우수리만으로 흘러든다.

예나 지금이나 만주에서 연해주 우수리스크로 오가려면 철도든 육로든 수이푼을 건너야 했다. 저 멀리 중국땅 수분혜와 머리를 맞댄 그로데코보가 서북쪽 지평선 부근에 보인다. 이 강을 건너던 동포와 독립운동가들의 심정은 어땠을까. 안내자가 수이푼의 전설 하나를 들려줬다.

수이푼이 흐르는 유역은 '해동성국' 발해의 영토였다. 우수리스크는 발해의 5경12부 가운데 한 곳으로 추정되며 발해성지가 두 곳 남아 있다. 그래서 소왕령(蘇王嶺)이라는 이름 외에 예로부터 쌍성자(雙城子)라 불리기도 했다. 발해가 925년 멸망한 후 이 일대는 유목민족의 각축장으로 변했다. 죽고 죽이는 전쟁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전쟁은 여인들에게 눈물의 근원이다. 부모형제와 자식을 전쟁터에서 잃어버린 여인들의 눈물은 마를 새가 없었다. 그 눈물이 모여 이룬 강이 곧 수이푼이라는 것이다. 카레이스키들은 이 전설에 따라 수이푼강을 슬픈강이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눈물의 강에 유해를 뿌린 우리의 독립운동가가 있다. 헤이그 밀사 이상설(李相卨)이다. 그는 1917년3월2일 48세를 일기로 서릿발 같은 유언을 남기고 서거했다.

“동지들은 합세하여 조국광복을 기필코 이룩하라. 나는 조국광복을 이루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나니 어찌 고혼(孤魂)인들 조국에 돌아갈 수 있으랴. 내 몸과 유품은 모두 불태우고 그 재마저 바다에 날린 후 제사도 지내지 말라.”

유언에 따라 유해는 화장한 뒤 아무르강에 뿌려졌다는 것이 종래의 통설이다. 그러나 당시 니콜리스크라 불리던 우수리스크에서 아무르강이 있는 하바로프스크까지는 6백㎞가 넘는다. 또한 러시아의 장례풍습상 화장시설은 거의 없었다. 따라서 그가 숨을 거두기 한 해 전에 요양차 와 있던 니콜리스크에서 화장을 해서 수이푼강에 뿌렸다는 설이 더 설득력 있어 보인다. 수이푼강을 아무르강의 지류라고 착각했기 때문에 이렇게 전해져 온 것은 아닐까.

물론 수이푼강에서도 어느 지점이었는 지 확실치 않다.중요한 것은 장소가 아니라 파란만장했던 한 독립투사의 삶과 한이 오늘날까지 던지는 의미일 것이다. 간간이 차들이 오가는 편도 1차선 다리 위에서 난간에 기대어 흐르는 강물을 내려다 보며 그가 일생동안 맞았던 죽음의 고비들을 잠시 생각해 본다.

독립운동에 투신한 선열들은 수많은 죽을 고비를 넘겨야 했다. 보재 이상설도 그랬다. 1870년 충북 진천에서 태어나 이역만리에서 생을 마감할 때까지 그에게도 크게 두 번 죽음의 고비가 있었다.

첫 번 째는 을사보호조약이 늑결(강제체결)된 1905년11월 서울 종로에서였다. 당시 그는 의정부 참찬이라는 벼슬로 을사조약을 체결하기 위한 대신회의의 실무책임자였으나 일제의 농간으로 회의에 참석조차 못했다. 그는 곧바로 고종이 을사5적을 처단하고, 조약을 파기할 것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대세는 이미 기울었고 원로대신들의 자결이 잇따랐다. 민영환(閔泳煥)의 자결소식을 듣고 종로에 모인 군중들에게 이상설은 울면서 거족적 항쟁을 촉구한 뒤 자결을 시도했다. 그러나 하늘은 아직 아까운 인재의 죽음을 허락하지 않았다. 일찍이 고종 31년(1894년) 문과에 급제, 율곡 이이를 조술(祖述·선인의 뜻을 이어받아 서술함)할 학자라는 세간의 평가를 듣던 그였다. 신학문에도 눈을 떠 신·구 학문에 두루 능통했다.

벼슬길에 올라 성균관 관장(오늘날 국립대학 총장), 학무협판(교육부차관), 법무협판(법무부차관) 등을 거치면서도 일본의 황무지개척권 요구를 물리치도록 하는 상소를 올리고, 신민회에 가담하는 등 국권수호를 위해 동분서주했던 이상설은 자결에 실패한 이듬해 봄 이동녕(李東寧) 등과 북간도 용정으로 망명했다. 그 곳에서 그는 항일민족 교육의 요람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세워 숙장이 되었다.

두 번 째 고비는 이준(李儁) 이위종(李瑋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