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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해자는 있어도 가해자는 없다'. 미군 범죄, 특히 최근들어 급증하고 있는 미군관련 교통사고의 경우 대부분 진실규명이나 가해자 처벌이 어려운 경우가 많다. 사진은 여중생 사망사건이 발생한 지난 2002년 뜨거웠던 반미시위의 한 장면.

 

해마다 이른 봄만 되면 정완수씨의 가슴 한구석은 찡하게 아려온다. 동네 골목 어귀에서 가늘게 숨쉬며 죽어가던 아들이 생각나서다.
 

“유치원을 갔다왔어요. 그리고 과자 사먹겠다고 해서 500원인가 줬는데 조금 있다가 다른 애들이 와서 '상길이가 피가난다'고 하더라구요.” 지난 88년 4월 정씨의 외아들 상길이는 여느때와 다름없이 동네 구멍가게로 달려갔다. 그러나 과자를 사기도 전에 골목길을 잘못 들었다가 후진하던 15인승 미군승합차에 치였다.

“뒤도 안보고 후진했나봐요. 후진하고서도 50m를 더 지났더군요. 그런데 현장에 가보니까 미군들이 상길이 몸 위에 흰 타월을 덮어놨더라구요. 죽은 줄 알았는데 열어보니까 숨을 쉬더라구요.” 뒤늦게 미군부대로 옮겼다가 다시 우리 병원으로 옮겼지만 상길이는 끝내 숨을 거뒀다.
 

“(상길이가 죽은 뒤로) 차를 운전한 미군을 단 한번도 못봤습니다. 들리기로는 본국으로 송환했다고 하는데. 장례식장에 미군 한명 볼수가 없었구요. 그저 지휘관 명의의 편지 한통과 장례비 50만원이 전부였습니다.” 정씨는 특히 우리 경찰로부터는 “조사 한번 받지 못했다”며 쓴웃음을 지었다.
 

미군차량에 아들을 잃은 정씨에게 3년전 일어났던 여중생 사망사고는 어떻게 비춰졌을까?

정씨는 “당시 사고가 진행되는 것을 자세히 지켜봤습니다. 그런데요, 옛날이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더라구요. 기본적으로 우리는 미군을 해방군으로 생각했지만 그들은 점령군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제대로 해결이 되겠습니까?”라며 반문했다. 정씨는 이어 “아들 손에 쥐어있던 500원짜리 동전을 갖고 있었는데 자꾸 생각나서 몇년전에 없앴습니다. 그래도 아직 봄만 되면 가슴이 아픕니다. 이제 3년밖에 안됐는데 그분들은 훨씬 더할 겁니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가슴에 묻은 딸 이제는 눈물도 안나와요.”
신효순·심미선양이 미군 궤도차량에 치어 목숨을 잃은지도 3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월드컵의 열기속에서 전국민적인 반미시위를 이끌어냈던 사고였지만 3년이라는 시간속에서 일반인들에게는 벌써 많이 잊혀져가고 있는 듯 하다.
 

얼마전 찾은 미선이 집에는 마침 할머니 윤석금(71)씨만 있었다. 아버지 심수보(52)씨와 어머니 이옥자(49)씨는 채소를 팔기 위해 시내에 나간 상태였다. 할머니 윤씨는 “지금도 미선이가 눈에 선하다”며 “피기도 전에 훌쩍 떠나버린 그 어린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찢어진다”고 말했다. 윤씨는 “며칠 전 미선이 오빠가 100일 휴가를 왔다 갔다”며 “짧은 휴가였지만 하루에 한번씩 추모비에 가서 잡초를 정리하고 비석을 닦아준 착한 오빠다”고 말했다.

효순이 가족은 옛날 집에서 300m 떨어진 산 아래로 이사갔다. 아버지 신현수(53)씨와 어머니 전명자(45)씨가 취재진을 반겼다.
 

신씨와 전씨는 “얼마전 검찰이 당시 사건자료를 공개했는데 미군들을 미워하는 마음은 없다”며 “법이 우리와 달라 그런 것 뿐인데 이제와서 얘기해 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고 말했다.
신씨는 “남아 있는 아이들을 위해 효순의 유품을 집안에서 모두 치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