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인 1776년 이후에 제작된 팔도전도(八道全圖)에 의하면 한반도 황해 관문인 백령도(白翎島)를 이렇게 표현했다. “백령도는 동서가 50리, 남북이 40리에 섬의 모형이 중앙은 오목하고 외부가 '+'자형으로 돌출하였고 바람이 강하고 험악하여 해방(海防)의 요충(要衝)이다.”
경기 서해 생명선이 백령도다. 17세기 말 서해안 해방(海防)의 문제에 있어서 해적보다 더 유의했던 것은 이른바 '황당선(荒唐船)'이라고 지칭되었던 중국어선들이었다. 이 때도 중국어선들이 연근해에 출몰하여 조업하거나 밀무역을 행하여 지역 주민들과 충돌하는 일이 잦아졌다. 이 것은 청나라가 중국인이 해외로 나가는 것을 막았던 해외도항(海外渡航) 금지를 해제하여 청나라인들의 해상활동이 활발해지고 서해를 무대로 활동하는 어선과 해적선의 활동이 증가하였기 때문에 나타난 문제였다. 얼마전 경기산하 서해어민의 생명선인 백령도 앞바다에 중국의 어선이 출몰하여 싹쓸이 조업으로 서해 도서민의 어업에 막대한 타격을 주었다는 사실과 이의 시정을 요구하는 서해도서민의 항의가 있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하는 '다시보는 경기산하'의 오늘이다.
17세기 황당선의 출몰은 국가적 위기의식이라는 측면에서는 큰 문제가 아니었으나 연안주민들의 안정된 생활을 위협하고 민심의 동요를 불러일으킬 요소가 있었다는 점이 3세기가 지난 오늘에도 재현되고 있다는 역사의 교훈이다. 1736년(영조14) 황당선 출몰 이래로 경기도 황해연안의 중요성이 부각된 서해5도(백령, 대청, 소청, 연평, 덕적)를 관할하는 옹진군의 역사기록에 의한 탐방으로 서 본다.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백령도는 본래 고구려의 곡도(鵠島)였는데 고려조에 백령진(白翎鎭)이라 하고 현종때에 진장(鎭將)을 두었다. 진촌리(鎭村里)의 지명에서 알 수 있듯이 백령도의 행정중심지 진촌리는 첨절제사의 진이 설치되었던 곳이다. 조선 세종9년인 1427년에 영강(永康)과 백령(白翎)을 통합해서 강령진이 되고 후에 강령현으로 되었다.
세종실록 기사중에 황해도 경차관의 장계에 '현지중앙 불의읍거 가이건읍성(縣之中央 不宜邑居 可以建邑城)'등의 구절이 있는 것으로 보아 강령진으로 출발이 결정된 후 다시 국방상의 진영(鎭營)만이 아니라 지방행정구역으로서의 현(縣)도 부활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것은 고려 공민왕 원년인 1352년에 백령도는 수로가 험하다 하여 이 곳의 주민들을 육지로 나가게 하여 황해도 문화현 동촌가을산(東村加乙山)에 살게 하였고 곧 땅이 좁다하여 진장을 폐하고 문화현에 속하게 하였던 사실을 말해주는 기록이다. 그러나 조선 세종9년 정월에 강령진으로의 출발이 결정된 후에는 다시 국방상의 진영만이 아니라 지방행정구역으로서의 현도 부활되었음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드디어 세종10년에는 원주민들의 입주요망과 황해감사의 계청에 의하여 백령진과 영강진을 합하여 강령진 및 현을 새로 설치하고 민중을 입주하게 하였으며 뒤이어 목장(牧場)을 설치, 군마(軍馬)를 기르게 하여 해상요지의 역할을 톡톡히 하기에 이른다. 수군첨절제사(水軍僉節制使)가 주둔하여 한반도 황해 관문인 백령도를 지킨이래 현재에 이르기까지 백령도는 역사의 격동기마다 군사요충으로 그 위치를 굳히고 있는 경기산하의 여울목이다. 그런가 하면 국토분단의 현장 NNL(북방한계선)과 서해교전의 비극, 용천역 사고 북한돕기 구호품수송선 운항로를 바라보며 한반도 통일의 길목을 여는 서해의 관문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삼국이래 해상교통의 교두보인 덕적도와 함께 백령도는 구한말 황해도 장단군에 속하여 첨절제사 대신 도장(島長)을 두어 행정, 사법을 장악하여 도장행정을 수행하다가 1910년 일제강점기 면장제(面長制)가 되었던 어쩌면 자치행정의 시원(始源)을 이룬 도서이기도 한 곳이다.
1945년 광복과 동시에 3·8선 획정으로 남·북이 분단될 때는 남한에 속하게 되어 옹진군 백령면이 되었다. 6·25 한국전쟁으로 옹진반도가 북한 관할이 된 후 옹진군은 연평도와 소연평도로 이루어진 송림면과 백령도, 대청도, 소청도를 관할하는 백령면 등 2개 면만이 옹진군을 이루고 있다가 1973년 7월1일 행정구역 개편으로 부천군에 속했던 6개면의 도서를 합쳐 8개 도서군으로 확장되었고 1974년 7월1일 대청도와 소청도가 대청면으로 승격되어 9개면을 통할하는 옹진군으로 경기도에 속했다가 1995년 3월1일 인천광역시로 통합되기에 이른다.
언필청, 서해5도 하면 우리는 백령도, 대청도, 소청도, 연평도, 장봉도를 떠올리게 되고 옹진군 관할 서해도서하면 덕적도, 선미도, 굴업도, 자월도, 영흥도, 문감도 등 남양만 일원의 도서를 연상케 된다. 이제 대중국 경제·문화 교류의 항로(航路)였던 생활의 궤적, 옹진군 도서의 역사현장을 따라가 본다.
백령면의 '진촌리패총'은 옹진군의 향토유적으로 지정된 선사시대의 유적이다. 백령면 사무
옹진(1)-서해5도서와 백령도 역사·문화
입력 2004-05-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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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5-17 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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