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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를 찾아…3년 대장정을 마치며(방담) 지면기사
경기산하(京畿山河)는 5천년 역사를 이어오며 단일문화권으로 세계문화사의 한 페이지를 당당하게 장식하고 있는 한민족 역사·문화의 모든 것을 품어 안은 곳이다. 지난 2002년 3월 경인일보사와 경기문화재단은 경기지역의 정체성을 찾아 지역주민들과 공감대를 형성하고, 21세기 세계 문화·역사를 주도할 당당한 주역으로 우뚝 설 발판을 마련하고자 '다시보는 경기산하-경기 역사·문화 대장정'에 나섰다. 그러기를 3년. '다시보는 경기산하 특별취재반'은 경기산하의 두 축을 형성하는 한남정맥의 남쪽 끝 안성 칠현산을 시작으로 한남·북정맥, 서해일대, 한탄강·임진강 일원, 비무장지대(DMZ)를 거쳐 옛 경기의 근원인 개성을 돌아보는 대장정의 막을 내렸다. 때론 더위와, 때론 추위와 싸워야 했고, 모자란 취재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무리한 취재로 목숨을 내걸기도 하며 경기산하 고을고을을 살펴온 특별취재반의 지난 여정은 그래서 참으로 값진 것이었다. 3년간의 대장정을 마치며 지난 취재과정을 결산하고, 앞으로 언제 다시 있을지 모를 경기산하의 역사·문화 대장정이 더욱 알차게 채워지길 기약하며 좌담회를 마련했다. 〈편집자 주〉강대욱=오늘 좌담회는 제가 좌장으로 사회를 보겠습니다. 우선 2년6개월동안 아무 탈 없이 '다시보는 경기산하'를 마무리할 수 있게 돼 매우 기쁩니다. 우선 대장정을 마치며, 이번 다시보는 경기산하 기획이 갖는 의미를 되짚어 보도록 합시다. 윤한택=21세기로 들어서면서 세상을 바라보는 눈들이 바뀌고 있습니다. 특히 경기지역 문화활동에 대한 시각과 이해에 대한 관심도가 높아가고 있습니다. 이번 기획은 이 같은 관점에서 경기산하의 문화·역사를 새로운 시각에서 정리하는 계기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약탈적 성장 등 정리 안된 부분도 이번 기획을 통해 정리했다는 점은 높이 살만한 가치가 있다고 봅니다. 정승모=대중매체에서 오랫동안 기획연재한 것도 처음이지만 한 도(道)를 시·군단위로 빠짐없이 취재한 것도 유례가 없는 기획이라고 봅니다. 경기도의 성격을 규명하려고 할 때 자칫 한 부분만 보고 확대 해석하던 것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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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2)-개성공단 부지 발굴체험기 지면기사
지난 6월 남북한 고고학자들이 대규모 공동조사단을 구성해 2개월여 동안 개성공단 터에 대한 대대적인 발굴조사를 실시했다.2000년 초 남북한간 문화재 연구 교류가 이뤄진 이후 사상 첫 북한지역에 대한 남북한 공동조사였다. 이 발굴조사에 남측 대표로는 한국토지공가 토지박물관을 비롯해 경기도박물관, 경기문화재단 부설 기전문화재연구원, 고려문화재 연구원, 한국문화재보호재단발굴조사단 등 5개 기관 20여명이, 북측 대표로는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 소속 고고학자 40여명이 참여했다. 유물산포지 12곳, 10만여평에 대한 공단 터에서 구석기 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수천 점의 다양한 유물이 출토됐다. 3년여 동안 꾸준히 옛 경기의 역사·문화를 되짚어온 '다시보는 경기산하'팀은 대장정의 막을 내리며 경기의 근원인 개성을 다루고 있다. 이번 '개성2편'에서는 개성 산업공단 발굴에 참여하고 돌아온 경기도박물관 송만영 민속미술부장으로 부터 '개성 발굴체험기'를 들어본다.〈편집자 주〉발굴단원 집결지인 분당을 떠나 도라산역 부근의 남쪽 출입국사무소에 도착하는 데에는 1시간 반이 걸렸으나 군사분계선을 넘어 개성공단에 들어가는 데에는 채 10분도 안 걸렸다. 올 여름처럼 가시거리가 좋은 날이면 자유로에서 개성 송악산(松岳山)의 이목구비가 뚜렷하게 보이는 거리이건만, 가는데 걸린 세월은 반 백년이 훌쩍 넘어버렸으니 10분도 걸리지 않은 북녘 땅까지의 거리감이 나로서는 당혹스럽다. 개성(開城)은 475년 고려왕조의 도읍지로 익히 알려져 있다. 그래서 일반인에게는 개성하면 으레 송악산 남쪽 기슭에 자리 잡은 고려왕조의 궁궐터 만월대(滿月臺)와 이방언과 정몽주의 악연이 서린 선죽교(善竹橋) 정도만을 떠올리겠지만, 개성에는 많은 불교 문화재와 왕릉급 고분, 성곽 등이 분포하고 있다. 개성 고려박물관에서 구입한 '개성의 옛자취를 더듬어'라는 책에는 군사, 궁전, 종교, 천문, 무덤 등으로 항목을 나누어 관련 유적을 소개하고 있는데, 대부분이 고려시대의 것이다. 실제 2000년에 북한에서 집계한 개성의 유적, 유물 출토지는 148개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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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1)-한반도 통합의 축, 지리와 역사 지면기사
개성(開城)은 한반도에서 패권을 다투던 고구려·백제·신라의 삼국시대(三國時代)이래 한반도 통일이란 통합의 물꼬를 틈으로써 민족통합의 역사적 대장정(大長征)을 이끌어 낸 고려왕도(高麗王都)의 터전이다. 9세기 말 10세기 초 경주의 신라, 전주의 후백제와 자웅을 겨루며 후고구려의 창업을 주도한 궁예(弓裔)의 전략기지였고, 이 곳을 발판으로 고려(高麗) 태조(太祖) 왕건(王建)은 후삼국을 통일함으로써 역사상 처음으로 한반도를 생활무대로 자웅을 겨루던 우리민족의 통합을 이룩한 고장이다. '고려사' 지리지에 “고려 태조가 고구려 땅에서 일어나 신라를 항복받고 후백제를 멸하여 개경(開京)에 도읍하고 삼한(三韓)의 땅을 통일하게 되었다”고 한데서 개성의 지리는 한반도 통합의 축(軸)임을 이야기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개성은 태조가 왕도를 설치한 특별구역이었던 개주(開州)를 개성부로 개편하고 적현(赤縣) 6개와 기현(畿縣) 7개를 관장하게 하여 경기(京畿)란 행정구역제도가 처음 역사의 장(章)에 등장한 곳이기도 하다. 한편 경기제도(京畿制度)가 성립된 1018년(현종9)은 지방제도를 전국적으로 개편하여 고려적인 형태로 지방제도가 자리잡던 해이다. 이때부터 서울을 둘러싸고 있는 지역을 '경기'라고 부르게 되었으며 때문에 경기는 정치·경계·군사·문화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왕건 태조 이래 475년, 실로 이 기간의 역사적 궤적은 동북아시아의 당당한 주권국으로서 외세 침략을 물리친 것은 물론 찬란한 민족문화를 꽃피운 민족사의 전성기이기도 했다. 오늘날 세계인에 각인된 코리아의 국명(國名)이 고려역사의 산물임을 일깨워주고 있거니와 고려왕조의 터전 개성은 그래서 분단의 장벽이 가로막힌 단절의 세월을 보내고 있을 지언정 우리의 가슴에는 언제나 늘 지척에서 문화의 동질성을 교감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꿈에도 그리운 백두대간에서 뻗어내린 임진북예성남정맥(臨津北禮成南正脈)의 줄기찬 지세가 송악산(松嶽山)에 응축되어 개성을 끌어안은 지리의 오묘함은 그대로 박연폭포의 장관을 이루어 송도삼절(松都三絶)이란 풍류일화(風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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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천(3)-강 따라 구비마다 역사유적을 담고 있는 곳 지면기사
임진강은 함경남도 덕원군 마식령 남쪽 계곡에서 발원하여 강원도를 거치며 남하하다가 남대천, 영평천, 풍천, 그리고 차탄천을 흡수한 한탄강과 만나면서 서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서해로 들어간다. 한탄강과 만나기 전까지 임진강은 징파강(澄波江)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원래의 연천 땅은 한탄강과 징파강 사이의 동북지역인데 징파강과 임진강 사이의 마전현(麻田縣)과 그 북쪽의 삭령현(朔寧縣) 등 세 고을을 합쳐 한 군을 이루게 되었다. 임진강의 수운(水運)구역은 현재 북한 땅인 강원도 이천군 안협면 포촌(浦村)에서 시작되어 마전까지 60㎞, 마전에서 고랑포(高浪浦)까지 20㎞, 그리고 고랑포에서 하구(河口)까지 40㎞ 등 세 구간으로 나뉘는데, 태종 때 삭령과 안협을 통합하여 안삭(安朔)으로, 마전을 연천에 붙여 마련(麻漣)이라고 고친 것에서 보듯이 고을을 분리하거나 합칠 때마다 중요한 변수가 되었다. 연천의 주요 역사유적지는 임진강 수운의 요지를 따라 가면 만날 수 있다. 고랑포에는 경순왕릉이 있고, 마전에는 숭의전(崇義殿)이 있다. 미수(眉●) 허목(許穆, 1595~1682)의 묘도 징파강 상류인 왕징면 강서리에 자리하고 있다. 수운을 따라 접근이 용이한 곳을 국가에서는 물론 사가(私家)에서도 선호하였던 것이다. 연천의 근기성(近畿性)은 이 강상로를 고려할 때 이중성을 갖는다. 지금은 같은 연천군에 속해 있지만 과거 수운의 혜택 범위 안에 있던 마전현과는 달리 꼬박 육로, 즉 철원로를 타야하는 연천현은 근기성이 떨어질 수 밖에 없다. 서울 관리들이 부임지로서 땅도 협소하고 백성 수도 적었던 마전보다 연천을 더 꺼렸는데 그 이유는 이 곳이 국왕이 자주 친임(親任)하는 강무지(講武地)여서 이로부터 얻게 되는 긴장감 때문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서울 다니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징파나루는 연천과 마전을 잇는 나루인데 징파강과 한탄강의 합류점 상류, 즉 현 왕징면사무소 부근인 무등리로 추정된다. 옛 지도에는 유포(楡浦), 또는 유연진(楡淵津)으로 표기되어 있다. 이 곳에서 강이 감입곡류(嵌入曲流), 즉 깊은 골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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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천(2)-물의 4덕(德)과 보개산의 넉넉한 그늘 지면기사
연천은 땅이름에 걸맞게 크고 작은 하천이 20여 개나 흐른다. 그 물줄기들이 모여 한탄강과 임진강을 이루어 서해에 보태고 있다. 물은 항시 수평을 유지하려 한다든지, 낮은 데로만 흐르고, 청결작용을 해준다 하여 물에 대한 이미지는 우리 인간이 본받아야 할 표상이 되기도 하였다. '군생(群生)을 목욕시키고 만물을 뚫고 흐르므로 인(仁)이요, 맑음으로 탁함을 없애고 더러움을 휩쓸어가므로 의(義)요, 부드럽지만 함부로 범하기 어렵고 약하지만 능히 이겨내니 용(勇)이요, 강으로 이끌되 내를 거쳐 가득함을 싫어하고 겸허하게 흐르므로 지(智)이다’. 중국 전국시대 초나라 사람 시자(尸子)가 예찬한 물의 4덕(四德)이다. #눈썹과 수염만큼이나 신령스러우면서 길고 깨끗한 삶 연천을 대표하는 인물 가운데 미수(眉●) 허목(許穆, 1595~1682)이 있다. 눈썹이 길어 눈을 가릴 지경이었으므로 '늙은이 눈썹(미수)’이라는 호를 썼는데 대기만성형이자 노력형의 표상이다. 그 스스로도 100번을 읽어야 겨우 깨우친다고 하였으니 62세 때 처음 벼슬다운 벼슬살이를 한 것으로 보아 물의 덕 가운데 인(仁)이라고 할 것이요, 조금 늦고 모자라는 듯 하면서도 자기 기준을 분명히 세워 조선 선비의 표상을 끝까지 지켜냈으므로 의(義)라고 하겠다. 오죽했으면 과거를 보지 않고도 우의정에까지 올랐으며 나라에서 집(은거당·恩居堂)까지 지어주었을까? 효종의 국상 때 인조의 계비(자의대비 조씨)가 과연 얼마동안 상복을 입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로 논란이 벌어졌다. 이른바 기해예송(己亥禮訟)이다. 이 때 효종은 인조의 둘째 아들이지만 왕위에 올라 왕실의 종통을 이었으므로 당연히 적자(嫡子)로 인정해 3년 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던 세력이 남인들이다. 그러나 효종이 엄연한 차남이므로 주자가례에 따라 1년 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한 서인들이 승리한다. 남인이었던 허목은 삼척부사로 좌천되고 같은 남인 고산 윤선도는 유배가게 되는데 자기의 주장을 굽히지 않고 질고의 삶을 선택했으므로 용(勇)아니겠는가? 삼척부사로 좌천되어서도 '척주지(陟州誌)'를 편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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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천(1)-고구려사 왜곡 허와 실…그 현장의 기록 지면기사
중국의 한반도 지배야욕 분쇄한 최후의 결전장 매초성(買肖城)터-고구려사 왜곡의 허(虛)와 실(實) 그 현장의 기록연천군은 경기도 최북단에 위치하여 동쪽은 청산면을 경계로 포천시와 서쪽은 장단군, 북쪽은 황해도 금천군 및 강원도 철원군과 접경을 이루고 있다. 황해도 금천군으로부터 남북으로 흘러내리는 임진강은 연천군의 중앙부를 종단하여 동남부에서 한탄강과 합류하고 서남으로 흘러 연천군과 파주시의 경계를 이루며 흘러간다. 이 두 강 유역은 결정편암층이 널리 분포되어 있어 강 양안은 대계 절벽을 이루고 있으며 많은 물이 급류를 이루며 흐르고 있어 유역은 평야지대를 형성하였다. 연천의 중심부는 현무암지역이 강원도 철원군과 평강지역에 연속되어 있으며 서북지역은 동남방이 모두 임진강으로 둘러싸여 있어 구릉지가 많고 토지가 비옥하다. 이러한 연천군의 지리와 주변의 자연환경은 풍부한 토지 생산성과 활발한 어로·수렵이 용이하여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살기에 적합한 지역이었다. 세계 고고학계의 주목을 받고있는 '전곡리 구석기 유적지 23만평'은 논외로 치더라도 군남면 남계리, 장남면 원당리 구석기 유적, 연천읍의 차탄리 지석묘, 통현리 지석묘군 7기 등 임진·한탄강 유역에 광범위하게 분포하고 있는 선사시대 문화유적과 전곡읍의 전곡리 지석묘, 은대리 지석묘, 양원리 지석묘 등이 역시 청동기시대 연천지역의 생활상을 말해주고 있다. 또 군남면 일원, 청산면, 백학면, 미산면, 왕징면 등 거의 전역이 구석기에서 신석기, 청동기, 원삼국시대의 유적으로 분포되어 있다. 특히 중면의 삼곶리 돌무지 무덤은 임진강변에 솟아있는 모래언덕을 깎아 그 위에 동·서 2개의 무덤을 덧붙여 축조한 쌍분(雙墳)으로서 동서 28m, 남북 14m, 높이 1.5m 안팍의 표주박 모양에 가까운 고구려 고유의 묘제(墓制)인 적석(積石) 무덤이다. 1991년부터 3차에 걸쳐 발굴조사 결과 동서 두 개의 덧널에서 목걸이 2조와 쇠화살촉 2점, 토기편 및 부서진 인골편(人骨片)등이 수습되었으며 무덤의 주변에서는 반파된 상태의 토기 4점과 숫돌편, 남근(男根) 형태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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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두천(4)-분단이 만든 도시, 동두천 지면기사
미군의 주둔 때문에 도시로 발전한 동두천, 한국 땅에서 미군이 가장 많이 주둔하고 있는 도시, 기지촌의 대명사이던 동두천이 흔들리고 있다. 미군이 없는 동두천을 상상해 본적이 있는가? 동두천시는 전체 면적의 75%가 군사시설보호구역 및 미군 공여지다. 그러면서 우리나라에서 미군이 가장 많이 주둔하고 있다. 주한미군 3만5천명 가운데 1만5천명이 동두천에 거주한다. 더욱이 동두천 시 전체 인구 7만3천명의 21%에 해당하는 3천600가구 1만5천여명이 주한미군 관련 생업종사자이고, 미군 관련 경제 규모는 연간 1천400억원으로 추정되는데 이는 지역총생산의 20%에 달하고 있다. 따라서 동두천은 미군의 존재를 전제로 만들어졌고 운영되었던 '군사도시'라 할만하다. 그러한 동두천에서 미군이 떠나간다고 한다. 1951년 이래 미군은 이 곳 사람들에게 물어보지 않고 드넓은 땅을 차지해 기지를 만들어 주둔했듯이 또 다시 아무런 사전 협의나 망설임 없이 그들의 필요에 따라 동두천을 떠나간다. 이 것이 한미관계의 본질이다. 2003년 4월부터 시작된 보산동 429 '한·미 문화의 광장’ 개설 공사는 이런 점에서 동두천의 현실을 여실하게 보여준다.#기지촌이라는 오욕의 역사 '동두천'이라는 이름에는 분단의 상처가 켜켜이 엉켜있다. 1992년 10월 미군에 의한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윤금이씨 살해 사건이 보산동에서 있었고, 2002년 6월 미군 궤도차량에 치여 죽은 심미선·신효순 사건에 대하여 동두천 캠프 케이시 미8군 군사법정은 무죄 평결을 내리는 것을 보아야 했다. 동두천은 기지촌의 영욕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다. 그것도 너무나 커다랗게. 산과 계곡에 울타리 치고 자리 잡고 있는 430만평의 캠프 케이시가 만들어지기 전부터 조상대대로 살아왔던 걸산동 주민들은 마을을 오가는데도 미군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 50년 세월을 견뎌왔다. 소요산을 병풍처럼 두르고 넓고 깊게 펼쳐진 계곡을 온전히 제 땅으로 하는 천혜의 자연 요새의 미군기지의 그 광활함에 비한다면 3번 국도와 경원선 그리고 신천이 흐르는 동두천 시내의 옹색함은 한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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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두천(3)-동편의 내[川]가 모래톱 휘감아 만든 작은 들 지면기사
과거 서울에서 원산을 경유하여 함흥으로 가려면 북관대로(北關大路), 즉 동북대로를 타야 했다. 그 길은 현재 경기도 제2청사가 자리한 의정부시 금오동을 지나 축석령을 넘어 포천시를 거쳐 강원도 김화로 연결되는 43번 국도다. 그런데 원산 가는 길로는 이것 말고도 철원로(鐵元路)가 있었는데 이 것이 현재는 평화로로 불리는 3번 국도로 양주시청이 있는 주내면을 지나 동두천과 연천을 거쳐 철원으로 향한다. 지금은 도로번호가 말해주듯 후자가 전자보다 상위도로인데 과거에는 거꾸로 전자가 대로였고 후자는 삼방간로(三方間路)로 부르던 분기로(分岐路)였다. 이러한 역전 현상이 언제, 왜 일어나게 된 것일까. 북관대로를 주로 다니던 원산 이북의 북어상들도 때때로 철원로를 이용하였는데 지름길은 아니지만 길이 평탄하다보니 점점 본로(本路) 못지않은 통행량을 유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철원로가 대로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은 일제시기 이후로 1914년에 이 길을 따라 서울과 원산을 잇는 경원선(京元線)이 개통되면서부터다. 당시 대로를 제쳐두고 간로를 택하여 철로를 놓게 된 데는 아마도 대로가 축석령과 같은 고갯길이 많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동두천시는 삼분의 이가 산지로서 시내를 조금만 벗어나도 주변은 온통 소규모 계곡평야에 생계를 맡긴 산촌(山村)들이 산촌(散村)되어 있다. 인구 또한 적었던 탓에 사천현(沙川縣)이라는 현 단위를 지키지 못하고 이담면(伊淡面)이라는 일개 면으로 축소되었다. 이렇듯 산으로 포위되어 그 중심에 겨우 동두천장(東豆川場) 하나를 유지하던 작은 들이 지금의 도시 모습으로 도약할 수 있었던 초기의 힘은 역시 철도였던 것이다. 중앙동에서부터 생연2동, 내행동 초입까지 연결되는 도로 양측에 상권이 형성될 수 있었던 것은 그 중심에 동두천역이 있기 때문이다. 동편내, 즉 동두천천은 시내 중심부와 동북쪽의 미군 2사단부대 뒤를 시계반대방향으로 감아 돌아 원터에서 신천과 합수한다. 풍천(楓川)으로 불렀던 신천은 북쪽으로 흘러 한탄강과 만난다. 원터는 과거 가정자역(架亭子驛)이 있던 곳이고 그 서남쪽으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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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두천(2)-소요하며 자재하고픈 동두천 지면기사
동두천시의 외곽은 크고 작은 산들로 둘러쳐져 있다. 탑동계곡의 칠봉산, 해룡산을 비롯해 왕방산, 국사봉, 소요산, 마차산 등. 양주시 쪽으로 열려 있는 남쪽과 연천군으로 이어지는 북쪽으로만 큰 통로가 이어져 3번 국도와 경원선 철로가 지나고 있다. 사실 그 통로는 아주 오래 전에 형성된 신천에 의해 개설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러다보니 큰 비가 내리면 사방에서 중심으로 모여드는 물 때문에 '난리'가 나는 것도 동두천의 숙명 아닌 숙명이다. 동두천의 그 많은 산 가운데 동두천을 대표하는 산은 단연 소요산이다. 해발 높이로만 친다면 국사봉, 왕방산, 해룡산, 수위봉에 이어 중간 밖에 되지 않는데 '왜 동두천 하면 소요산'이라는 등식이 성립하는 것일까? 요즘엔 '웰빙' 때문인지 등산 인구가 많이도 늘었다. 그러나 등산이 본격화되기 전부터 사람들이 즐겨 찾던 산이 소요산이었다. 서울에서 경원선 기차를 타고 소요산 역에서 내리기만 하면 바로 소요산의 품으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청량폭포와 원효폭포 등 시원한 물줄기를 토해내는 폭포와 원효대사, 요석공주의 지고지순한 사랑이 묻어있는 자재암 등의 경승지가 있었기에 더욱 그랬다. 소요산이라는 이름은 또 어떤가? '소요(逍遙)'라 함은 '기분 내키는 대로 거닐다', '바람을 쐬다', 혹은 '자적(自適)하여 즐기다'라는 뜻 아닌가. 세상에 구애받지 않고 유유자적하는 스님들의 삶을 빗대기도 하여, '소요복(逍遙服)'이라 하면 스님의 옷, 가사(袈裟)를 뜻하기도 하고, '소요자재(逍遙自在)'라고 하면 '구속됨 없이 자유로이 소요함'을 뜻한다. 요즘 같은 황량한 세상에 이 얼마나 좋은 이름이랴! 게다가 소요산에는 자재암(自在庵)까지 있어 그야말로 '소요자재'인 산이다.#원효대사와 의상대사 자재암은 원효대사와 의상대사의 얼이 깃든 전설의 절로도 유명하다. 대개의 사찰이 그 격을 높이기 위해 원효대사나 의상대사, 혹은 도선국사 같은 고승들을 끌어들여 창건주로 숭앙하고 있다. 그러나 자재암은 한 술 더 떠서 원효대사의 창건에 의상대사의 수도처로 두 대사를 '모시고' 있다. 또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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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두천(1)-한북정맥 산하 임진강수계 품안 지면기사
경기도 북부지역인 황해도, 강원도에서 서울로 직통되는 유일한 도로는 포천의 43번 국도와 연천에서 동두천, 의정부를 거쳐 미아리로 연결되는 경원선 국도이다. 특히 동두천을 관통하는 도로는 천험의 지세인 소요산과 마차산이 기각지세로 바라보며 요충을 이루고 있다. 때문에 6·25 한국전쟁 초기 동두천의 봉암리 일때는 남진하는 북한군의 주력부대와 이를 저지하기 위한 한국군이 치열한 접전을 벌여야 했다. 군사도시로 성장한 지리적 여건에서 주한미군의 주력부대가 주둔할 수 밖에 없는 안보요충도시 동두천의 태생적 운명이 답사반의 가슴을 짓누르고 있다. 동두천시는 경기도 북단에 위치하여 수도를 방위하는 전진기지다. 대부분이 산지로 이루어져 있고 중앙으로 강화천과 동두천천이 구릉지를 북류(北流)하면서 연안에 좁은 충적지(衝積地)를 형성해 동두천 주민들에게 생활무대를 제공하고 있다. 서쪽으로 마차산, 동쪽에 소요산을 비롯하여 국사봉, 수위봉, 왕방산, 해룡산 등의 높은 산으로 둘러 싸여 있다. 경기 소금강으로 불리는 소요산에는 원효폭포, 청량폭포, 비룡폭포가 수려한 산세를 돋보이게 하고 있으며 동쪽으로 왕방산의 왕방폭포, 국사봉의 백운폭포 등이 심산궁곡(深山窮谷)의 정취를 더해주고 있다. 이중환은 동두천 지방의 지형에 대해 '택리지'에서 이렇게 표현했다. “함경도 안변부 철령(鐵嶺)의 일맥이 남으로 500∼600리를 달려서 양주의 여러 작은 산이 되고, 동북쪽에서 비스듬히 돌아들면서 갑자기 솟아나 도봉산의 만장봉이 된다”고 하였다. 동북쪽은 높이가 400∼500m 이상되는 높은 산들로 험한 산지를 이루었고, 국사봉과 서쪽으로 소요산이 솟아 아름다운 자태를 뽐낸다. 역사이래 동두천시의 영역은 양주군의 이담면(伊淡面) 지역이었다. 1963년 동두천이 읍(邑)으로 승격된 이후 군사도시로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다. 1979년 7월1일 포천군 포천면 관할이던 탑동의 3개리가 동두천읍으로 편입되어 행정구역이 확장되었다. 1981년 7월1일 양주군에서 분리되면서 동두천은 시(市)로 승격돼 현재에 이르고 있다. 비록, 분가한지 23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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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4)-북한산성이 말해주는 민족사 지면기사
고양시는 조선왕조시대 도성(都城)이었던 한양의 서북지방 요지로 오늘에 이르는 612년을 서울 생활권으로 위치를 굳힌 곳이다. 동북은 양주군이, 동남은 광주군이, 서남은 시흥군이 사면으로 도성을 둘러싼 형상을 이루면서 소위 말하는 왕조시대 4대문 밖을 관할하던 곳이다. 오늘날 서대문·은평구 일원이 고양군 땅이었다. 역사이래 삼각산 서북지역인 북한산을 고양군의 주산(主山)으로 기록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북한산은 고양군 역사의 시원(始源)을 이룬 경기오악(京畿五岳)의 북악(北岳)이었다. 고양시 일산이나 원당 등에서 서울쪽을 바라보면 인수봉, 백운대, 만경봉 세 봉우리가 삼각을 이루어 나란히 공중에 툭 튀어 나와있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1392년 조선왕조가 고려도성인 개성에서 창업되고, 1395년 한양에 신축된 경복궁으로 천도하게 된다. 이 시기 태조 이성계가 백운대에 올라 포부를 밝힌 등반시(登攀詩)를 보자. “손 당겨 댕댕이 넝쿨 잡고 푸른 봉우리에 오르니/ 한 암자가 흰 구름 속에 높이 누워 있네/ 만약 눈에 들어오는 세상을 내 땅으로 만든다면/ 초나라 월나라 강남을 어찌 받아 들이지 않으리(引手攀蘿上碧峯/一庵高臥白雲中/若將眼界爲吾土/楚越江南豈不容).” 실로 장쾌한 한반도 통치자 군왕의 기상이다. 아시아 대륙의 중심무대인 중국의 북쪽지역과 양자강 이남의 중국 전토를 국토로 만들겠다는 포부다. 서해안시대 중국을 상대로 역사 문화의 새지평을 열어야하는 시대적 소명의 분수령이다. 고구려유적이 중국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는 상황이다. 이제 대륙을 향한 꿈이 시대를 초월하여 민족의 지상과제로 자존의 역사를 일깨우고 있는 시점이다. 조선시대 한양도성을 중심으로 전국이 9개 노선(路線)의 간선(幹線)으로 도성을 향한 응집력을 구축할 때 고양시의 벽제관(碧蹄館)은 대륙(大陸)에의 꿈을 실현하는 첩경, 의주로(義州路)의 거점이었다. 조선시대 서울에서 중국으로 통하는 관서로(關西路)는 의주로 또는 연행로(燕行路)로 회자되었던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중국으로 가는 사절(使節)이 숙박·휴식하였고 특히 벽제관은 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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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3)-북한산, 그리고 왕릉과 왕실의 묘원 지면기사
백두의 정기를 물려받은 한북정맥이 가장 수려한 모습으로 빚어놓은 산, 북한산에 오른다. '삼각산'으로도 불리고 있는 이 산은 수도 서울의 진산이면서 고양시의 주산이기도 하다. 고양시의 이곳 저곳을 답사할 때 불현듯 나타나 눈 맛을 즐겁게 해주곤 하던 그 '잘생긴 자태'를 잊을 수 없다. 또 잘생긴 것만큼이나 요긴하게 쓰인 게 북한산이다. 북한산의 대표 유적으로 북한산성이 있으며, 태고사·중흥사 등의 절이 있어 그 중요성을 더하였는데, 중흥사에는 치영(緇營)이 있어 승병 400여명이 북한산성의 방어를 위해 고종 때까지 주둔하기도 하였다. 신라 진흥왕순수비가 서 있던 비봉이며, 지금은 서울 땅에 들어갔지만 삼천사의 마애불 등도 북한산을 대표하는 유적들이다. 특히 삼천사의 마애불은 잘 생긴 북한산에 견줄만한 비례와 자태를 뽐냄으로써 답사객과 신도들의 마음을 붙잡고 있다. 이 계곡의 한 벼랑바위에 부처님의 생명력을 불어넣은 사람은 과연 누구일까?#소도둑을 용서하자 서오릉의 북동쪽, 역시 지금의 서울 땅에 '검암기적비(黔巖紀蹟碑)'가 있다. 지금 이 일대는 신도시 건설 계획으로 뒤숭숭한 듯 여기저기 구호를 적은 깃발들이 난무하고 있다. 다만 검암기적비 근처는 꽃을 재배하는 비닐하우스 밀집 지역이어서 꽃향기라도 바람에 흩날리니 그나마 다행이다. 조선 경종 1년(1721) 왕의 동생인 연잉군은 아버지 숙종의 탄신일에 맞추어 명릉(明陵)에 참배하고 돌아오다가 쉬고 있었다. 그때 어떤 사람이 황급히 소를 몰고 개울을 건너가고, 곧이어 급하게 뒤따라간 사람이 앞사람을 잡아 소도둑이라고 소리친다. 한순간의 일이었다. 소도둑은 흉년이 들고 춥고 배고파서 저지른 일이라고 사정했다. 연잉군은 수행한 담당자를 시켜 소는 주인에게 돌려주어 농사를 짓도록 하고 도둑은 관에 고발하지 말도록 하였다. 그렇게 처리하고 서울로 돌아오니 가마가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아들이 없으면서 병약한 경종의 후사를 잇도록 결정이 난 것이다. 연잉군은 뒷날 임금(영조)이 되어 이 날의 사건을 곱씹었다고 한다. 백성들이 모두 편안하고 넉넉하면 도둑은 저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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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2)-도성의 관문·문인의 고장 지면기사
고양은 서울에서 관서대로를 따라 이북 의주로 가는 첫 길목에 자리한 시다. 한강을 건넌 1번 국도는 북한산의 북한산성과 한강 하류의 행주산성 사이를 외길로 나아가다 벽제를 지나면서 서북으로 향한다. 두 산성은 오랜 기간 각기 도성(都城)의 북쪽과 서쪽을 막는 관문(關門) 역할을 해 왔다. 북한산성 축조는 숙종 29년에 시작하여 37년인 1711년에 완료되어 훈련도감·어영청·금위영 등 삼군문(三軍門)이 그 관리를 맡았다. 북한산성은 당시 북벌정책으로 청나라의 위협이 예견되던 시국이었으므로 유사시 도성민의 도피처로 축조한 것인데, 가는 길도 험준하고 수용 면적도 협소하였기 때문에 반대가 끊이지 않았지만 워낙 강화 함락의 충격이 컸던 탓에 계획을 포기할 수도 없었다. 행주산성은 덕양산 자락에 한강을 맞대고 세워진 토성으로 강을 타고 서울로 들어올 때 통과해야 하는 마지막 방어선이다. 이 곳과 난지도 사이는 물길이 얕고 물 흐름도 느려 마치 호수 같은 느낌을 주었으므로 이를 행호(幸湖 또는 杏湖)로 불렀다. 강가의 주민들은 고기잡이로 생계를 꾸렸다. 겸재 정선이 그린 '행호관어(杏湖觀漁)'는 바로 이 광경을 담고 있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를 보면 웅어에 대해 나오는데, 속명으로는 위어(葦魚)라고 하며 이 곳에서 잡히는 특산물이다. 덕양구 행주외동 용정 서쪽기슭에 사옹원(司饔院)의 분사(分司)가 있었는데 늦은 봄이 되면 대궐 음식을 준비하는 사옹원 관리들이 그물을 던져 이 것을 잡아다가 임금에게 진상하였다. 주민들은 생선장수가 되어 '횟감 사라'고 소리치며 한양 거리를 돌아다녔다. 그러나 이 곳 강가는 잦은 침수와 범람으로 살기에는 편치 않은 곳이었다. 강가를 벗어난 지역은 온통 왕실 능원과 사대부 묘로 덮여있어 편치 않기는 매 한가지다. 1925년 을축년 대홍수 이후 '대보둑’이 축조되어 그나마 생활은 좀 나아졌지만 주민들은 여전히 부업을 하지 않고는 부족한 살림을 채울 수 없었다. 이들의 오랜 겨울철 부업은 소위 '갈땅’이라고 부르는 습지에서 나는 갈대로 공예품을 만들어 서울에 내다 파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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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1)-한강 둑 터지며 커져간 고장 지면기사
#터지면서 커져 간 고양고양은 한강을 끼고 있지만 한강의 혜택을 그리 크게 받지 못한 땅이다. 한강가의 숱한 이름 짜한 나루에도 고양의 그 것은 빈약하다. 이웃한 마포나루와 공암나루, 혹은 양화진과 노량진, 아랫녘으로 김포의 조강나루에 비해 행주나루의 명성은 그리 크지 않은 듯하다. 고양지역 한강 유역의 길고 넓은 개펄은 나루의 발달을 막았고, 특히 한양과 가까운 훌륭한 이웃 나루들의 명성에 묻힐 수밖에 없었다. 고양은 한양의 지척에서 오히려 북한산성이 있는 요새지이자 관서대로(의주로)의 길목으로 중요성을 인정받았던 땅이다. 전근대 고양은 1번 국도가 통과하는 벽제읍 지역이 중심일 수밖에 없었다. 이후 고양 땅의 한복판에 있는 원당읍으로 중심지가 이동하다가 1908년 경의선 철길이 깔리고 한강을 따라 '자유로'가 뚫리면서 지도읍과 일산읍이 새로운 중심지로 부상해 온 역사를 지닌다. 즉, 통일로 동북쪽 지역 벽제읍에서 통일로와 경의선 철로 사이 야산지대인 원당읍을 지나 경의선 철로의 서남쪽 지역 평야지대인 일산읍과 지도읍으로 인구와 물산이 이동해온 셈이다.#오, 백마!1970년대말 혹은 80년대초 삭막한 도시 생활의 답답함과 무료함을 달래며 서울을 벗어날 수 있는 곳이 너무도 가까이 있었던 고양 땅이다. 고등학교 시절 서대문 무악재 언저리에서 하숙을 하던 때 아무 이유도 없이 버스 종점까지 가곤 하였다. 서울풍경과 다른 어떤 것이 있었을 것 같은 막연한 기대에서 였다. 종점이었던 삼송리에서 조금만 걸으면 곡릉천을 만나게 되고 벽제역 근처의 서울 교외선 철길과 만나는 지점에 와서야 비로소 삭막한 감상이 해갈되곤 하였다. 그 해갈은 저 너머 '통일로'를 지나면 멀고 먼 북녘이라는 막연한 격절감과 연결되곤 하였다. 이런 추억과 낭만은 서부역 혹은 신촌에서 경의선 열차를 타고 능곡 혹은 백마에 내려본 사람들은 누려봤음직한 충만함이다. 서울에서 몇 정거장 지나지 않았지만 시골의 풍취가 물씬 풍기는 그곳의 넉넉함은 떠나온 자들의 들뜸으로 한껏 부풀어 오른 자유와 만날 수 있었다. 그 아름다운 이름의 백마역이 백석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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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4)-통일로 가는 길목 지면기사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는 땅경기 땅에서 한강 수운의 넉넉한 혜택으로 축복받은 땅은 남한강 여주와 바다 쪽 강화도, 그리고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는 파주를 꼽을 수 있다. 풍부한 물산에 기반한 찬란한 문화유산과 자연 풍광은 이 고을들을 기전의 복전이 되게 했다. 특히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두 물의 양수(兩水)에 비해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 섞이는 교하(交河)의 넉넉함을 파주 땅은 지니고 있는 셈이다. 두 강이 몸을 섞는 교하의 장관을 성동리 오두산은 누천년 지켜봤고 물속 고기들도 기꺼워하건만, 지금의 사람들만이 이 자연의 아름다움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할 뿐이다. 경계와 감시의 눈초리로 강 너머를 살펴 볼 뿐이니. 두 강물이 섞여 조강(祖江)이라는 이름으로 서해로 흘러들어가는 길목, 오두산성이 있는 곳에 오두산 통일전망대가 있다. 백제와 고구려가 서로 빼앗으려 온 힘을 다했던 이 곳에 또 다시 남북이 대치한 채 서 있는 모습이고 보면 역사의 혹독함을 느끼게 된다. 1980년대 이후 만들어지기 시작한 통일전망대라는 것이 있다. 500원 짜리 동전을 넣으면 작동하는 망원경을 통해 500원 어치 만큼의 통일을 갈구하는 우리의 얄팍한 통일의지는 건너편 동포들의 실팍한 삶을 구경거리 삼아 노닥거릴 뿐이다. 통일을 긍정적으로 전망하는 토론과 사색의 공간이 아니라 남북의 대치상황 만을 교묘히 각인시키는 분단의 교육장이던 그런 전망대에서 무슨 통일을 전망하란 말인가? 그러나 6·15공동선언 4주년을 맞이한 6월의 파주는 또 한번 역사 속에서 기꺼운 춤을 출 수 있게 되었다. 각기 남북은 그동안 통일을 위한 노력이란 이름으로 서로에 대한 불신만 높여왔던 대남·대북 방송 스피커를 비롯한 각종의 선전물을 철거하기 시작하였다. 이제 서로를 쉽게 바라 볼 수 있는 곳에서 체제 선전물이 철거된 온전한 산하의 건강한 모습을 볼 날이 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통일의 염원이 반통일의 고함을 잠재워 가는 즈음이다. 이것은 2000년 9월18일 역사적인 경의선 복원 및 도로 연결을 위한 기공식이 임진각에서 열린 이래 파주는 통일의 염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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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3)-고려·조선 양 朝 이은 近畿지역 지면기사
소위 '서교(西郊)’로 불리는 송도와 한양 사이의 경기 서북지역은 고려와 조선을 거쳐 근기(近畿)의 위치를 고수하고 있는 지역이다. 반면 한강이남의 경기지역은 조선에 들어와 근기가 된 지역이다. 조선 초기에 이미 전조(前朝)의 세도 가문들은 한강 이북에서 이남으로 진출하였다. 파주나 양주에서 용인으로 이동한 연일 정씨, 용인 이씨, 한양 조씨 등이 그 예다. 이들 외에도 한산 이씨, 양천 허씨, 광주 이씨, 여흥 민씨, 양주 조씨, 덕수 이씨 등은 이미 이전부터 근기 여러 곳에 세거지를 두었다. 파주를 본관으로 하는 파평 윤씨는 양 조를 거쳐 본관지를 세거 기반으로 삼아 가세를 잃지 않고 대를 이어왔다. 이들을 대표하는 인물로 고려 예종(睿宗)때 여진 정벌의 공을 세운 윤관(尹瓘)이 있다. 고려 태조를 도와 삼한공신에 오른 시조 윤신달(尹莘達)의 현손으로 파평면 금파리에서 출생하였으며 광탄면 분수리에 묘가 있다. 파평면 눌로리(訥老里)에는 시조의 탄생 설화를 담고 있는 '용연(龍淵)'이라는 천연으로 형성된 못이 있는데, 면적이 2천500여평으로 입구에는 1920년에 세운 파평윤씨용연비(坡平尹氏龍淵碑)와 1972년에 세운 파평윤씨발상지비(坡平尹氏發祥址碑)가 있다. 교하읍 당하리, 와동리 일대에는 파평 윤씨 정정공파(貞靖公派) 묘역이 조성되어 있다. 묘 주인의 면면을 보면 세조비 정희왕후의 아버지 파평부원군(坡平府院君) 윤번을 비롯해 중종비 장경왕후의 아버지 파원부원군(坡原府院君) 윤여필, 중종 계비 문정왕후의 아버지 파산부원군(坡山府院君) 윤지임 등 부원군 묘 3기와 정승의 묘가 5기, 판서의 묘가 8기, 승지의 묘가 12기, 참판의 묘가 30기에 이른다. 눌로리는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 우계(牛溪) 성혼(成渾, 1535~1598)의 집이 있던 곳이기도 하다. 그는 서울 순화방에서 태어나 중종 39년(1544)에 아버지 성수침을 따라 눌로리 우계로 이사하여 그 곳에서 성장하였다.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연천과 강원도 이천(伊川) 등지를 전전하면서 피난하던 중 이천에 머문 세자 광해군을 돕는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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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2)-통일로 가는 '징검다리' 지면기사
#통일을 위한 징검다리 고양시 벽제관 터에서 광탄면을 지나 파주읍을 거치고 임진나루너머 개성으로 가는 길이 서울에서 개성 가는 지름길이었다. 지금은 파주시청이 있는 금촌 쪽으로 큰 길이 나있어 소롯길 같은 느낌이지만 옛 명성 때문인지 차량의 통행만큼은 만만치 않은 곳이다. 개성이 파주의 위쪽에 있고 서울은 그 아래쪽에 있어 양촌 권근은 '두 서울 중간에 유숙하는 곳'이라고 하였고 남재는 '작은 고을 관아를 요긴한 길목에 지었다'고 했다. 그러다 보니 이 곳에 역과 원이 많았을 것이 틀림없는데 광탄원도 그 중 하나이다. 지금의 광탄면 일대일 것으로만 짐작되는데, 이 곳에서부터 서울과 개성까지의 거리가 거의 같아 나그네가 많이 머물렀다고 한다. '두 서울'로 통행하는 지름길에 사람과 물산의 이동도 많았을 것이니 이 길가 용미리에 초대형 석불이 있다 해서 놀랄 일이랴! 논산시 은진면의 관촉사 미륵불이나 부여 성홍산 대조사 석불, 그리고 안동의 제비원 석불 등도 교통로이거나 중요한 지점에 서 있는 것이 공통이다. 특히 불상의 아랫볼이 이마보다 넓은 특징들도 공유하고 있고, 멀리서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만큼의 거불(巨佛)이란 점도 같다. 전체적으로 매우 크고 '헤비급'처럼 중량감 또한 느껴지는데 거대한 천연암벽에 몸을 조성하고 목과 머리, 갓은 따로 조성해 올렸다. 이 또한 안동 제비원의 석불 양식과 비슷하다. 이 석불의 얼굴은 보면 볼수록 친근해진다.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얼굴, 이웃집 아저씨·아주머니의 얼굴 같기도 하고 텔레비전에 나오는 '네모'얼굴 같기도 하다. 그만큼 토속적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그래서 그런지 기도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중요한 길목에 있으므로 이 지역 최대의 수호신이었을 테고, 그 큰 덩치만큼이나 소원을 잘 들어줄 것만 같으며, '아이를 바라면 득남을 할 것이고, 병을 가진 사람은 곧 쾌차하리라'는 전설처럼 소박하디 소박한 민중들의 염원 또한 끊이지 않기 때문이리라. 게다가 석불들의 시선이 용미리 묘지에까지 다다르고 있음에 우리는 저승까지 안심해도 되는 것 아닌가? #한 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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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1)-산하에 투영된 민족사의 궤적 지면기사
민족분단의 현장, 그 응어리로 하여 반세기를 하루같이 이산가족의 아픔을 대변하는 것이 오늘의 파주시이다. 분열, 통합의 궤적을 걸어온 민족사의 어제, 임진강을 가슴으로 안고 통일의 길목을 여는 파주산하의 살아있는 미소를 본다. 답사팀의 여정이 분단의 현장, 자유의 다리를 바라보며 망배단을 둘러보는 이심전심의 시간이었다. 하루 3번 도라산역으로 가는 경의선 열차 시간표에서 한단계 앞당겨진 통일의 이정표를 보는 듯 하다. 경기산하 서북부를 수려하게 장식하는 '경기오악(京畿五嶽)'의 하나인 감악산(紺岳山)과 기나긴 역사의 흐름속에서 문화의 터전이 되어왔던 임진강의 물줄기에서 분출하는 경기산하의 생명력이 되살아 나고 있다. 선사시대인이 살았던 삶의 흔적이 처처에 남아있어 최적의 생활터전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는 곳, 뿐만 아니라 지리의 요충은 역사발전의 지렛대임을 일깨우듯 역사시대의 문화유산이 곳곳에서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쟁패이래 경기서북방의 전략거점이었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천혜의 조건을 고루 갖춘 지역이 파주의 지리와 문화환경이다. 산이 있고 넓은 들, 그리고 큰 강이 양쪽에서 흘러들기 때문이다. 한강과 그 지류라고 볼 수 있는 임진강은 파주를 감싸고 돌아 바다로 흘러드는 형상이다. 바닷물도 강을 따라 육지 깊숙히 들어오는데 이러한 해수(海水)와 육수(陸水)가 접합하는 물의 환경은 풍부한 자연생태계의 보고가 될 수밖에 없는 지리적 조건이다. 지리에서 역사와 문화가 태동되었던 현장, 인류문화의 흔적인 선사시대 유적을 살펴본다. 청동기 시대는 인류가 청동으로 도구나 무기를 만들어 쓰기 시작한 때로부터 철기를 만들어 쓰기까지의 기간을 말한다. 청동기시대 주민들의 풍습을 말해주는 고인돌, 석관묘, 토광묘, 무문토기 등 청동기 유물은 한반도 전역에 걸쳐 발견되고 있다. 파주지역의 다율리, 당하리, 덕은리는 고인돌의 밀집지역이고 옥석동, 당동리 등지에서 발견된 토기, 석기 등은 중부지방 청동기 문화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교하리 주거지에서는 무문토기, 공렬문토기가 출토되었다. 그 구조는 간단하여 움바닥을 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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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진(1)-서해5도서와 백령도 역사·문화 지면기사
조선후기인 1776년 이후에 제작된 팔도전도(八道全圖)에 의하면 한반도 황해 관문인 백령도(白翎島)를 이렇게 표현했다. “백령도는 동서가 50리, 남북이 40리에 섬의 모형이 중앙은 오목하고 외부가 '+'자형으로 돌출하였고 바람이 강하고 험악하여 해방(海防)의 요충(要衝)이다.” 경기 서해 생명선이 백령도다. 17세기 말 서해안 해방(海防)의 문제에 있어서 해적보다 더 유의했던 것은 이른바 '황당선(荒唐船)'이라고 지칭되었던 중국어선들이었다. 이 때도 중국어선들이 연근해에 출몰하여 조업하거나 밀무역을 행하여 지역 주민들과 충돌하는 일이 잦아졌다. 이 것은 청나라가 중국인이 해외로 나가는 것을 막았던 해외도항(海外渡航) 금지를 해제하여 청나라인들의 해상활동이 활발해지고 서해를 무대로 활동하는 어선과 해적선의 활동이 증가하였기 때문에 나타난 문제였다. 얼마전 경기산하 서해어민의 생명선인 백령도 앞바다에 중국의 어선이 출몰하여 싹쓸이 조업으로 서해 도서민의 어업에 막대한 타격을 주었다는 사실과 이의 시정을 요구하는 서해도서민의 항의가 있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하는 '다시보는 경기산하'의 오늘이다. 17세기 황당선의 출몰은 국가적 위기의식이라는 측면에서는 큰 문제가 아니었으나 연안주민들의 안정된 생활을 위협하고 민심의 동요를 불러일으킬 요소가 있었다는 점이 3세기가 지난 오늘에도 재현되고 있다는 역사의 교훈이다. 1736년(영조14) 황당선 출몰 이래로 경기도 황해연안의 중요성이 부각된 서해5도(백령, 대청, 소청, 연평, 덕적)를 관할하는 옹진군의 역사기록에 의한 탐방으로 서 본다.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백령도는 본래 고구려의 곡도(鵠島)였는데 고려조에 백령진(白翎鎭)이라 하고 현종때에 진장(鎭將)을 두었다. 진촌리(鎭村里)의 지명에서 알 수 있듯이 백령도의 행정중심지 진촌리는 첨절제사의 진이 설치되었던 곳이다. 조선 세종9년인 1427년에 영강(永康)과 백령(白翎)을 통합해서 강령진이 되고 후에 강령현으로 되었다. 세종실록 기사중에 황해도 경차관의 장계에 '현지중앙 불의읍거 가이건읍성(縣之中央 不宜邑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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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산(4)-개펄위에 세운 新산업도시 지면기사
#수인선과 사리포구 허기진 영혼과 일상의 권태를 못견뎌 하며 느닷없거나 뜬금없이 수인선(水仁線) 협궤열차를 타봤던 청춘들은 또렷이 기억하리라. 덜컹거리며 느릿느릿 달리는 협궤열차의 겉모습과는 달리 기차 안 풍경은 마주보고 앉은 사람들의 낯설지 않은 시선과 서로 아는 사람들의 왁자한 인사 속에 비릿한 새우젖 냄새까지 하나가 되어 흘러갔다는 것을. 수원에서 출발하여 사리~원곡 등 지금의 안산지역 연안을 따라 인천까지 이어진 수인선은 일본자본에 의한 조선 수탈의 상징적 존재였다. 경동철도(주)가 공사에 착수한 지 2년만인 1937년 8월6일 개통되었는데, 이 때는 만주침략과 중일전쟁으로 일본 군수업자와 산업자본가에게는 호시절이었다. 이미 1931년 수원에서 여주까지 개통된 수여선(水驪線)과 수인선을 연결해 하루 5번씩 운행함으로써 경기내륙의 질 좋은 쌀과 군자만 일대에서 생산되는 소금을 쉽게 인천으로 반출하고 일본제 상품들을 내륙 깊숙이 판매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웃한 대도회 인천과 수원을 나드는 중요한 교통수단이었던 이 협궤열차는 해방 이후에도 고작 부천 가는 버스 외에 변변한 버스노선이 없었던 고즈넉한 안산을 기억하는 이들에겐 향수를 자극하는 매개가 되었다. 사리와 소래포구는 수인선 덕분에 싱싱한 갯것들을 수원과 인천 사람들에게 팔 수 있어 명성을 얻었다. 사리를 비롯한 경기연안 포구들의 주요한 생계는 새우잡이였다. 오뉴월에 잡은 새우는 포구에 닿자마자 인근 농촌마을 아낙들의 손에 의해 대·중·소로 분류되는데, 새우 이외의 꽃게를 비롯한 바닷고기들은 '잡어' 취급을 받아 아주머니들이 가져온 함지에 품삯으로 얹혀졌다. 분류된 새우는 곧바로 염장을 하여 새우젖이 되고 꽃게를 비롯한 나머지 것들은 포구 인근 마을에서 꽃게찜이나 생선구이가 되었다. 하루만 지나도 상하기 때문에 현지에서 바로 먹어 치워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리나 소래포구는 새우 뿐 아니라 꽃게와 생선들도 도회지에서 온 사람들에게 곧장 팔 수 있어 여타 포구보다 흥청거리게 되고, 인근의 배들도 사리와 소래포구에 닻을 내리게 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