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성(開城)은 한반도에서 패권을 다투던 고구려·백제·신라의 삼국시대(三國時代)이래 한반도 통일이란 통합의 물꼬를 틈으로써 민족통합의 역사적 대장정(大長征)을 이끌어 낸 고려왕도(高麗王都)의 터전이다.
 
9세기 말 10세기 초 경주의 신라, 전주의 후백제와 자웅을 겨루며 후고구려의 창업을 주도한 궁예(弓裔)의 전략기지였고, 이 곳을 발판으로 고려(高麗) 태조(太祖) 왕건(王建)은 후삼국을 통일함으로써 역사상 처음으로 한반도를 생활무대로 자웅을 겨루던 우리민족의 통합을 이룩한 고장이다. '고려사' 지리지에 “고려 태조가 고구려 땅에서 일어나 신라를 항복받고 후백제를 멸하여 개경(開京)에 도읍하고 삼한(三韓)의 땅을 통일하게 되었다”고 한데서 개성의 지리는 한반도 통합의 축(軸)임을 이야기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개성은 태조가 왕도를 설치한 특별구역이었던 개주(開州)를 개성부로 개편하고 적현(赤縣) 6개와 기현(畿縣) 7개를 관장하게 하여 경기(京畿)란 행정구역제도가 처음 역사의 장(章)에 등장한 곳이기도 하다.
 
한편 경기제도(京畿制度)가 성립된 1018년(현종9)은 지방제도를 전국적으로 개편하여 고려적인 형태로 지방제도가 자리잡던 해이다. 이때부터 서울을 둘러싸고 있는 지역을 '경기'라고 부르게 되었으며 때문에 경기는 정치·경계·군사·문화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왕건 태조 이래 475년, 실로 이 기간의 역사적 궤적은 동북아시아의 당당한 주권국으로서 외세 침략을 물리친 것은 물론 찬란한 민족문화를 꽃피운 민족사의 전성기이기도 했다.
 
오늘날 세계인에 각인된 코리아의 국명(國名)이 고려역사의 산물임을 일깨워주고 있거니와 고려왕조의 터전 개성은 그래서 분단의 장벽이 가로막힌 단절의 세월을 보내고 있을 지언정 우리의 가슴에는 언제나 늘 지척에서 문화의 동질성을 교감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꿈에도 그리운 백두대간에서 뻗어내린 임진북예성남정맥(臨津北禮成南正脈)의 줄기찬 지세가 송악산(松嶽山)에 응축되어 개성을 끌어안은 지리의 오묘함은 그대로 박연폭포의 장관을 이루어 송도삼절(松都三絶)이란 풍류일화(風流逸話)가 시대를 초월하여 세인에 회자되고 있으니 이는 개성만이 갖는 아이덴티티(Identity)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어쨌거나 한강·임진강·예성강을 포용한 개성의 지리는 한반도의 심장부에 해당하는 남북교통로 축선의 요충이다. 전국의 교통이 집산하는 요지였고 해상교통의 거점으로 황해·강원·경기의 내륙지방과 연결, 내륙과 해양을 잇는 교량과 같은 위치였다.
 
고려시대 개성은 경기만의 해상교통로를 통해 중국 등 해외 제국과 문화교류는 물론 대외무역의 길목이 되기도 하였다. 고려의 관문이자 국도인 개성으로 가는데 반드시 거쳐야 했던 나루터 벽란도(碧瀾渡)는 그래서 고려의 국제항구 역할을 했던 곳이다.
 
개성의 서쪽 개풍군 서면 예성강 하류에 위치하였던 바다 항구였다. 경기도와 황해도의 경계를 따라 흘러 황해로 들어가는 예성강은 강의 흐름이 비교적 빠르며 벽란도는 바다에 가까이 위치하고 있어 조수가 밀려드는 불리한 조건을 갖고 있지만, 비교적 물이 깊어 선박이 자유로이 통행할 수 있었다. 고려 국도(國都) 개성과 가까이 위치하였던 관계로 벽란도는 제일의 바다나루터이자 실질적인 유일의 국제 항구였다.
 
고려시대 중국의 송나라 상인 뿐만 아니라 일본을 비롯하여 멀리 남양지방(南洋地方)과 서역지방(西域地方)의 행상들까지 자주 드나들며 교역을 하였던 곳이다. 때문에 외국으로 나가거나 국내로 들어 오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하는 오늘날 국제항의 몫도 톡톡히 했던 곳이다. 그런가 하면 특히 육로로 중국에서 오는 도로상에 있어 통행인도 많았던 교통의 요지였다.
 
조선시대에는 주요 간선도로상에는 위치하지 않았으나 개성에서 황해우도(黃海右道)로 통하는 대로상에 위치하였던 나루터로 교통의 요지로서의 기능을 수행하였던 곳이었다. 때문에 도승(渡丞)이 한명 배치되어 나루터를 관할하기도 하였다.
 
한편 이 지역은 고구려와 백제의 영토이었다가 다시 고구려의 관할로 되었고, 고구려가 망한 뒤에는 잠시 당나라가 영향력을 행사한 곳이기도 했다.
 
'다시보는 경기산하-연천군'편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고구려·백제·신라인의 연합전선으로 연천군 대전리의 매초성에서 당군을 축출한 이후에는 신라의 관할이 된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 그 뒤 고려왕조 창업으로 왕도(王都)가 개성에 정하여 지고 도로망이 정비됨에 따라 벽란도의 중요성은 증가되었고, 더욱이 국제항으로 개항된 것은 벽란도의 중요성을 한층 높여준 것이었다.
 
조선시대는 개성부에 속하였다가 행정구역개편에 따라 경기도 개성군 서면에 속하였다. 개성이 시로 승격되자 벽란도는 개풍군 서면에 속하게 되었고 8·15광복이후 3·8선 획정으로 남·북이 분리될 때는 남한에 속하였다. 그러나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