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위 '서교(西郊)’로 불리는 송도와 한양 사이의 경기 서북지역은 고려와 조선을 거쳐 근기(近畿)의 위치를 고수하고 있는 지역이다. 반면 한강이남의 경기지역은 조선에 들어와 근기가 된 지역이다. 조선 초기에 이미 전조(前朝)의 세도 가문들은 한강 이북에서 이남으로 진출하였다. 파주나 양주에서 용인으로 이동한 연일 정씨, 용인 이씨, 한양 조씨 등이 그 예다. 이들 외에도 한산 이씨, 양천 허씨, 광주 이씨, 여흥 민씨, 양주 조씨, 덕수 이씨 등은 이미 이전부터 근기 여러 곳에 세거지를 두었다.
파주를 본관으로 하는 파평 윤씨는 양 조를 거쳐 본관지를 세거 기반으로 삼아 가세를 잃지 않고 대를 이어왔다. 이들을 대표하는 인물로 고려 예종(睿宗)때 여진 정벌의 공을 세운 윤관(尹瓘)이 있다. 고려 태조를 도와 삼한공신에 오른 시조 윤신달(尹莘達)의 현손으로 파평면 금파리에서 출생하였으며 광탄면 분수리에 묘가 있다. 파평면 눌로리(訥老里)에는 시조의 탄생 설화를 담고 있는 '용연(龍淵)'이라는 천연으로 형성된 못이 있는데, 면적이 2천500여평으로 입구에는 1920년에 세운 파평윤씨용연비(坡平尹氏龍淵碑)와 1972년에 세운 파평윤씨발상지비(坡平尹氏發祥址碑)가 있다. 교하읍 당하리, 와동리 일대에는 파평 윤씨 정정공파(貞靖公派) 묘역이 조성되어 있다. 묘 주인의 면면을 보면 세조비 정희왕후의 아버지 파평부원군(坡平府院君) 윤번을 비롯해 중종비 장경왕후의 아버지 파원부원군(坡原府院君) 윤여필, 중종 계비 문정왕후의 아버지 파산부원군(坡山府院君) 윤지임 등 부원군 묘 3기와 정승의 묘가 5기, 판서의 묘가 8기, 승지의 묘가 12기, 참판의 묘가 30기에 이른다.
눌로리는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 우계(牛溪) 성혼(成渾, 1535~1598)의 집이 있던 곳이기도 하다. 그는 서울 순화방에서 태어나 중종 39년(1544)에 아버지 성수침을 따라 눌로리 우계로 이사하여 그 곳에서 성장하였다.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연천과 강원도 이천(伊川) 등지를 전전하면서 피난하던 중 이천에 머문 세자 광해군을 돕는다. 그런데 그 전에 선조 임금이 의주로 파천할 때 파주를 지나가다가 “성혼의 집이 이 근처라는데 어디쯤인가”하고 묻자 옆에 있던 이홍로(李弘老)가 “저기 보이는 집이 바로 혼의 집입니다”라고 강가의 마을을 가리키며 거짓으로 대답하였다. 서울에서 의주로 가는 길은 홍제원~신원~고양~벽제역~파주~동파역~장단~개성으로 연결되기 때문에 성혼의 집과는 다소 떨어져 있으며, 당시 성혼은 집에 있었지만 파천 소식을 뒤늦게 알아 그 곳을 지나는 임금을 알현할 수 없었다. 성혼은 이로 인해 임금에게 미움을 샀고 그 오해를 풀지 못하고 죽었다.
파산서원은 우계와 그의 아버지 성수침(成守琛, 1493∼1564), 작은아버지 성수종(成守琮, 1495∼1579) 및 휴암(休庵) 백인걸(白仁傑, 1497∼1579)의 위패를 봉안하고 제향을 올리는 곳이다. 선조 원년(1568)에 율곡 선생과 휴암 선생 등 파주지역 유생들의 주창으로 창건되어 효종 원년(1650)에 사액(賜額)을 받았다. 대원군(大院君)의 서원 철폐 때도 존속되었던 전국 47개 서원중의 하나다.
금촌에서 탄현면사무소를 거쳐 문산 방면으로 진행하다가 오금리 삼거리로 들어와 오금 2리 방앗간을 끼고 돌면 신도비와 묘역이 보인다. 그 주인공은 세종 이후 여러 요직을 지내면서 천문(天文) 관찰에 많은 업적을 남긴 밀양 박씨 박중손(朴仲孫, 1412~1466)이다. 묘 앞 장명등의 화사(火舍) 구조가 독특한데, 전면과 후면은 방형(方形)으로 화창(火窓)을 내었으나 동쪽은 해를 상징하는 원형(圓形), 서쪽은 달을 상징하는 반월형(半月形)의 화창을 두어 생전의 그의 업적을 기리고 있다. 이 집안도 조선중기까지 가세를 유지해 온 유력 가문이다.
파주의 위치가 고려와 조선의 도읍지 사이라는 점 때문에 이 곳에 터를 잡은 집안들이 거주지를 옮기지 않고도 오랜 기간 근기의 이점을 누릴 수 있었지만 파주의 파(坡)자가 그렇듯이 본디 넘어야 할 고개도 많고 건너야 할 개천도 많은 험애한 지형이라 지역과 집안 모두 그 명성이 조선후기로까지 이어지지는 않았다. 특히 파주, 양주, 그리고 연천의 3개 군 경계에 걸쳐있는 감악산(紺嶽山) 일대는 조선 정부에서 굳이 별도의 방어 병력을 두지 않았을 정도로 접근이 힘든 곳이다. 답사팀 또한 예외는 아니어서 우여곡절 끝에 감악산 정상에 오를 수 있었다.
이 곳에서 지금도 우리가 만날 수 있는 유적은 석단(石壇)과 그 위에 선 비(碑), 그리고 정상 동쪽으로 조금 아래에 위치한 우물이다. 북한산 순수비(巡狩碑)를 연상케 하는 감악산비는 글자가 닳아 없어졌다고 해서 조선시대에도 '몰자비(沒字碑)’라고 하였고 당나라 장군으로 감악산신이 된 설인귀(薛仁貴)와 연관시켜 '설인귀비’라고도 불렀다. 조선에서는 감악산을 중사(中祀)로 받들었지만 설인귀는 민간의 사사로운 산신으로 격을 내리면서 조선후기 이전까
파주(3)-고려·조선 양 朝 이은 近畿지역
입력 2004-06-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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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6-14 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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