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서울에서 원산을 경유하여 함흥으로 가려면 북관대로(北關大路), 즉 동북대로를 타야 했다. 그 길은 현재 경기도 제2청사가 자리한 의정부시 금오동을 지나 축석령을 넘어 포천시를 거쳐 강원도 김화로 연결되는 43번 국도다. 그런데 원산 가는 길로는 이것 말고도 철원로(鐵元路)가 있었는데 이 것이 현재는 평화로로 불리는 3번 국도로 양주시청이 있는 주내면을 지나 동두천과 연천을 거쳐 철원으로 향한다. 지금은 도로번호가 말해주듯 후자가 전자보다 상위도로인데 과거에는 거꾸로 전자가 대로였고 후자는 삼방간로(三方間路)로 부르던 분기로(分岐路)였다. 이러한 역전 현상이 언제, 왜 일어나게 된 것일까.
북관대로를 주로 다니던 원산 이북의 북어상들도 때때로 철원로를 이용하였는데 지름길은 아니지만 길이 평탄하다보니 점점 본로(本路) 못지않은 통행량을 유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철원로가 대로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은 일제시기 이후로 1914년에 이 길을 따라 서울과 원산을 잇는 경원선(京元線)이 개통되면서부터다. 당시 대로를 제쳐두고 간로를 택하여 철로를 놓게 된 데는 아마도 대로가 축석령과 같은 고갯길이 많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동두천시는 삼분의 이가 산지로서 시내를 조금만 벗어나도 주변은 온통 소규모 계곡평야에 생계를 맡긴 산촌(山村)들이 산촌(散村)되어 있다. 인구 또한 적었던 탓에 사천현(沙川縣)이라는 현 단위를 지키지 못하고 이담면(伊淡面)이라는 일개 면으로 축소되었다. 이렇듯 산으로 포위되어 그 중심에 겨우 동두천장(東豆川場) 하나를 유지하던 작은 들이 지금의 도시 모습으로 도약할 수 있었던 초기의 힘은 역시 철도였던 것이다. 중앙동에서부터 생연2동, 내행동 초입까지 연결되는 도로 양측에 상권이 형성될 수 있었던 것은 그 중심에 동두천역이 있기 때문이다.
동편내, 즉 동두천천은 시내 중심부와 동북쪽의 미군 2사단부대 뒤를 시계반대방향으로 감아 돌아 원터에서 신천과 합수한다. 풍천(楓川)으로 불렀던 신천은 북쪽으로 흘러 한탄강과 만난다. 원터는 과거 가정자역(架亭子驛)이 있던 곳이고 그 서남쪽으로는 해발 586m의 마차산(磨嵯山) 아래에 안흥동(安興洞), 상패동(上牌洞) 등의 취락이 발달되어 있는데, 이 곳이 사족(士族)들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마을들이다.
고려 충렬왕 때 밀직부사를 지낸 의령(宜寧) 남씨(南氏) 남군보(南君甫)의 증손 중에 을번(乙蕃)과 을진(乙珍) 두 형제가 있었다. 첫째 을번의 아들 재(在)와 은(誾)은 조선 태조를 적극 도와 개국공신이 되었고 이후에도 후손들이 벼슬을 놓지 않으며 명문가문을 이어갔다. 그러나 아우 을진은 고려 때 여러 벼슬을 역임하였지만 말기에 정치가 문란해지자 이 곳 상패동에 은거한 후 신하된 사람으로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며 태조의 출사 권유에도 나아가지 않았다. 태조는 그의 충절을 높이 평가하여 사천백(沙川伯)으로 부르고 주변의 땅을 봉(封)했다. 숙종 38년(1712)에 이 곳 유림들은 사천서원(沙川書院)을 지어 '조준'의 아우로서 두류산으로 들어가 고려에 대한 충절을 지킨 '조견'과 함께 그를 제향(祭享)하였다.
안흥동은 광주(光州) 정씨(鄭氏)의 세거지다. 조선 산천의 진경(眞景)을 그려낸 겸재 정선이 바로 광주 정씨 14세손이다. 그는 3세 인진(麟晋)의 후손으로 인진의 아우 구진(龜晋)의 후손인 이 곳 정씨들과는 파를 달리한다. 아우 구진이 일찍이 상경하여 이 일대에 터를 잡은 반면 형 인진과 그 후손들은 조선전기 내내 본관지인 전라도 광주와 나주에 머물다가 겸재의 고조부인 10세 연(演, 1541~1621)이 남재의 7세손인 판서 남응운(南應雲)의 사위가 되면서 서울과 경기도 동북부에 터전을 마련한다.
구진의 후손인 이 곳 광주 정씨의 안흥동 입향(入鄕)은 8세 정이주(鄭以周, 1530~1583)에서 비롯되므로 대략 16세기 후반에 이루어졌다. 정유재란 때 공을 세웠고 선조실록 편찬에도 참여한 그의 아들 사호(賜湖)는 근기지역의 문호들과 폭넓은 인맥을 맺었다. 예컨대 상촌(象村) 신흠(申欽)은 아버지 정이주의 묘비문을 썼고, 동명(東溟) 정두경(鄭斗卿)은 그의 생질이라는 인연으로 이 집안과 관련한 많은 글을 남겼다. 또한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의 딸을 며느리로 맞이하였으며, 손녀는 계곡(谿谷) 장유(張維)의 손부(孫婦)가 되었다.
안흥동 시골에서 출생한 12세 허주(虛舟) 정치상(鄭致相, 1658∼1722)이 전국을 유람하며 시화집을 낸 것은 이러한 배경을 고려하면 결코 우연이 아닌 것 같다. 그가 남긴 시 '이담팔경(伊淡八景)'은 안곡 이유(李瑜, 1683~1758)가 쓴 초당십경(草堂十景)과 함께 앞으로 동두천시가 기지촌의 오명을 씻고 새로 시작하기 위해 꼭 챙겨할 청량제가 될 것이다. 이담팔경의 8승경은 다음과 같다.
'逍遙(소요산), 磨叉(마차산), 松峴(소리개), 栗灘(밤여울), 柯亭(가정자), 王邦(왕방산), 楮田(지행동 종이골), 院基(원터)'
동두천(3)-동편의 내[川]가 모래톱 휘감아 만든 작은 들
입력 2004-08-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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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8-09 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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