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시는 조선왕조시대 도성(都城)이었던 한양의 서북지방 요지로 오늘에 이르는 612년을 서울 생활권으로 위치를 굳힌 곳이다. 동북은 양주군이, 동남은 광주군이, 서남은 시흥군이 사면으로 도성을 둘러싼 형상을 이루면서 소위 말하는 왕조시대 4대문 밖을 관할하던 곳이다. 오늘날 서대문·은평구 일원이 고양군 땅이었다.
 
역사이래 삼각산 서북지역인 북한산을 고양군의 주산(主山)으로 기록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북한산은 고양군 역사의 시원(始源)을 이룬 경기오악(京畿五岳)의 북악(北岳)이었다. 고양시 일산이나 원당 등에서 서울쪽을 바라보면 인수봉, 백운대, 만경봉 세 봉우리가 삼각을 이루어 나란히 공중에 툭 튀어 나와있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1392년 조선왕조가 고려도성인 개성에서 창업되고, 1395년 한양에 신축된 경복궁으로 천도하게 된다. 이 시기 태조 이성계가 백운대에 올라 포부를 밝힌 등반시(登攀詩)를 보자.
 
“손 당겨 댕댕이 넝쿨 잡고 푸른 봉우리에 오르니/ 한 암자가 흰 구름 속에 높이 누워 있네/ 만약 눈에 들어오는 세상을 내 땅으로 만든다면/ 초나라 월나라 강남을 어찌 받아 들이지 않으리(引手攀蘿上碧峯/一庵高臥白雲中/若將眼界爲吾土/楚越江南豈不容).”
 
실로 장쾌한 한반도 통치자 군왕의 기상이다. 아시아 대륙의 중심무대인 중국의 북쪽지역과 양자강 이남의 중국 전토를 국토로 만들겠다는 포부다. 서해안시대 중국을 상대로 역사 문화의 새지평을 열어야하는 시대적 소명의 분수령이다. 고구려유적이 중국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는 상황이다. 이제 대륙을 향한 꿈이 시대를 초월하여 민족의 지상과제로 자존의 역사를 일깨우고 있는 시점이다.
 
조선시대 한양도성을 중심으로 전국이 9개 노선(路線)의 간선(幹線)으로 도성을 향한 응집력을 구축할 때 고양시의 벽제관(碧蹄館)은 대륙(大陸)에의 꿈을 실현하는 첩경, 의주로(義州路)의 거점이었다. 조선시대 서울에서 중국으로 통하는 관서로(關西路)는 의주로 또는 연행로(燕行路)로 회자되었던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중국으로 가는 사절(使節)이 숙박·휴식하였고 특히 벽제관은 때로 국왕이 고양관내 왕릉에 친제(親祭)때 숙소로 이용되기도 했다. 더욱이 벽제역관은 중앙관청 공문을 지방관청에 전달하며 외국사신의 왕래와 관리의 여행 또는 부임때 마필을 공급하던 역(驛)을 동반하고 있어서 교통·통신의 편의를 최대한 이용할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벽제관은 한양도성으로 가는 길목에 인접하고 있기 때문에 중국에서 오는 사신들은 도성인 한양에 들어오기전 반드시 벽제관에서 숙박하고 다음날 예의를 갖추어 한양의 왕궁으로 들어오는 것이 정례로 되어 있었다. 이 곳을 기점으로 북방으로 혜음령(惠陰嶺)과 동북으로 퇴패치(退敗峙-됫박고개) 그리고 서남으로 펴져가는 도로를 이어 임진왜란(壬辰倭亂) 당시 명(明)나라 이여송(李如松)과 왜군이 치열한 접전을 벌인 이른바 벽제관(碧蹄館) 싸움의 전쟁터 중심지가 되기도 했다.
 
역사의 길목 의주로를 오가는 600여년 그 많은 외교, 경제, 문화, 사신 행렬과 대중국 민간경제의 한 축을 담당했던 오늘의 의주로 기점인 벽제관에서 개성공단으로 직통되는 남북 역사·문화·경제 교류의 장이 역사의 전철이 되어 이 시대의 소망으로 재현되길 기대해 본다.
 
고양시의 오늘을 살펴본 답사팀의 발길이 필연적으로 머물러야 하는 곳이 북한산성의 행궁지다. 고양시의 산하(山河)를 가슴에 품고 통일의 길목을 여는 피할 수 없는 역사의 현장에서 분출하는 북한산의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다.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 한강유역을 차지하는 세력이 한반도를 경영하였다는 역사적 필연성은 필자가 '경기산하' 한강유역을 이야기할 때마다 짚고 넘어간 대목이다. 한강유역은 오늘날 서울의 중심을 흐르는 한강하류일대인 고양시 일원과 북한산으로 표현되는 백두대간에서 뻗은 한북정맥이 서해안으로 뻗으면서 그 산줄기가 자리잡은 곳, 즉 고양땅의 산하다. 백제시조 온조왕이 북한산에 올라 도읍지를 선정한 이래 북한산은 우리 민족사의 중심 무대가 되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북한산성은 삼국시대에 백제의 토성으로 개루왕 5년(132)에 축조되었다. 백제가 위례성에 도읍할 때 도성을 지키는 북방의 성으로 축조한 것이다. 이후 북한산 비봉의 신라 진흥왕 순수비에서 보듯이 북한산 일대는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시대 중심 요새지로서 삼국사이의 주요한 쟁탈 대상지였던 것이다.
 
고려시대인 11세기초에도 거란의 침입이 있자, 현종은 고려 태조의 유품을 북한산 향림사로 옮겨오고 산성(山城)을 증축하였다. 뿐만 아니라 고려 고종 19년(1232) 몽고군의 2차 침략 때도 이 곳에서 몽고군과의 격전이 있었다. 그 후 우왕 13년(1387)에는 왜구에 대한 방비책으로 최영 장군을 보내어 북한산 노적봉을 중심으로 고양시 관내 중흥동에 석성을 수축하기도 하였다. 이 성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