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을 위한 징검다리
 
고양시 벽제관 터에서 광탄면을 지나 파주읍을 거치고 임진나루너머 개성으로 가는 길이 서울에서 개성 가는 지름길이었다. 지금은 파주시청이 있는 금촌 쪽으로 큰 길이 나있어 소롯길 같은 느낌이지만 옛 명성 때문인지 차량의 통행만큼은 만만치 않은 곳이다. 개성이 파주의 위쪽에 있고 서울은 그 아래쪽에 있어 양촌 권근은 '두 서울 중간에 유숙하는 곳'이라고 하였고 남재는 '작은 고을 관아를 요긴한 길목에 지었다'고 했다. 그러다 보니 이 곳에 역과 원이 많았을 것이 틀림없는데 광탄원도 그 중 하나이다. 지금의 광탄면 일대일 것으로만 짐작되는데, 이 곳에서부터 서울과 개성까지의 거리가 거의 같아 나그네가 많이 머물렀다고 한다.
 
'두 서울'로 통행하는 지름길에 사람과 물산의 이동도 많았을 것이니 이 길가 용미리에 초대형 석불이 있다 해서 놀랄 일이랴! 논산시 은진면의 관촉사 미륵불이나 부여 성홍산 대조사 석불, 그리고 안동의 제비원 석불 등도 교통로이거나 중요한 지점에 서 있는 것이 공통이다. 특히 불상의 아랫볼이 이마보다 넓은 특징들도 공유하고 있고, 멀리서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만큼의 거불(巨佛)이란 점도 같다. 전체적으로 매우 크고 '헤비급'처럼 중량감 또한 느껴지는데 거대한 천연암벽에 몸을 조성하고 목과 머리, 갓은 따로 조성해 올렸다. 이 또한 안동 제비원의 석불 양식과 비슷하다. 이 석불의 얼굴은 보면 볼수록 친근해진다.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얼굴, 이웃집 아저씨·아주머니의 얼굴 같기도 하고 텔레비전에 나오는 '네모'얼굴 같기도 하다. 그만큼 토속적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그래서 그런지 기도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중요한 길목에 있으므로 이 지역 최대의 수호신이었을 테고, 그 큰 덩치만큼이나 소원을 잘 들어줄 것만 같으며, '아이를 바라면 득남을 할 것이고, 병을 가진 사람은 곧 쾌차하리라'는 전설처럼 소박하디 소박한 민중들의 염원 또한 끊이지 않기 때문이리라. 게다가 석불들의 시선이 용미리 묘지에까지 다다르고 있음에 우리는 저승까지 안심해도 되는 것 아닌가?
 
#한 많은 여인의 절 보광사
 
용미리 석불에서 벽제관 쪽으로 나와 됫박고개를 넘으면 보광사가 나온다. 길은 이렇게 빙 둘러서 가야하지만 직선거리로는 용미리 석불 동쪽 10여리 쯤 고령산 자락에 위치해 있다. 신라 진성여왕 8년(984) 도선국사가 창건하고 고려말에 무학대사가 머물렀다는 유서 깊은 절이다. 그러나 그 보다는 조선시대에 들어와 왕실의 원찰이 되면서 더욱 각광받았던 절이다. 영조 임금의 생모인 숙빈 최씨의 묘원 소령원(昭寧園)이 영장리에 들어서면서 생긴 변화이다. 절 이름도 고령사(고령산사·高嶺山寺) 이었다가 보광사(普光寺)로 고쳐 불렀다고 한다.
 
사실 숙빈 최씨는 조선최대의 신데렐라였다. 궁중에 나인으로 들어가 숙종의 승은을 입고 왕자까지 낳았으며 그 왕자가 왕이 되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끝내 자식이 왕이 되는 것을 보지는 못한 채 죽어(숙종44년·1718년) 왕이 된 자식의 애달픔을 배가시킨다. 애달픔이 클수록 추모의 마음도 더욱 깊어지는 법. 영조는 어머니의 사당과 묘원에 자주 행차한다. 보광사 대웅보전 편액은 영조의 친필이라 전하는데, 대웅보전 오른편 위쪽에는 아담한 어실각(御室閣)이 있고 숙빈 최씨의 영정과 신위가 모셔져 있다.
 
보광사에는 또한 아담하지만 화려하면서도 단단한 느낌을 주는 조선시대 범종이 있어 나그네의 발길을 잡는다. 보광사의 내력등과 인조12년(1634)에 조성되었다는 것이 명문으로 새겨져 있어 더욱 반가운 범종이다. 여기저기 베풀어진 무늬도 섬세하여 답사객의 피로를 씻어주게 한다. 그 뿐인가, 용의 머리를 닮은 목어가 범종 옆에 매달려 있는데 전체적인 모습도 잘 어울릴뿐더러 세부조각 또한 뛰어나다. 그리고 대웅전 외벽은 나무판자 벽으로 마감하였는데 그 곳 또한 그림들로 치장돼 있다. 판벽이어서 밖에서도 염불 소리가 낭랑하게 들린다. 여기서 지난 4월 마지막 빨치산 정순덕 여사의 영결식이 열렸다니 한 많은 여인들의 넋을 위한 절인가 보다.
 
#영조 임금의 가족 묘원
 
숙빈 최씨의 묘원인 소령원은 '신데렐라'의 주인공 느낌을 전혀 주지 않는다. 주변 산세가 단아하고 얌전하며 엄숙하기까지 하여 저절로 옷깃을 여미게 한다. 단정하게 꾸민 묘원의 최대 호사라면 비석의 머릿돌이라 할 것이다. 정교하게 용머리를 새기고 날아갈 듯한 기와집의 모양으로 장엄하였다. 묘원을 지키는 문화재청 안웅기씨는 침이 마를 정도로 소령원의 산세와 분위기를 전달하려 애쓴다. 묘막을 짓고 시묘살이하던 영조가 심었을까? 비각 옆에는 제법 크고 굵은 향나무가 잘 자라고 있다. 그러나 밑둥은 누구의 손길인지 여기저기 훼손되어 있다. 아마도 인근에서 향을 쓰기위해 조금씩 떼어간 탓이리라.
 
소령원 앞 산 기슭에는 수길원(綏吉園)이 있다. 영조의 후궁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