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3)-북한산, 그리고 왕릉과 왕실의 묘원
입력 2004-07-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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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의 정기를 물려받은 한북정맥이 가장 수려한 모습으로 빚어놓은 산, 북한산에 오른다. '삼각산'으로도 불리고 있는 이 산은 수도 서울의 진산이면서 고양시의 주산이기도 하다. 고양시의 이곳 저곳을 답사할 때 불현듯 나타나 눈 맛을 즐겁게 해주곤 하던 그 '잘생긴 자태'를 잊을 수 없다. 또 잘생긴 것만큼이나 요긴하게 쓰인 게 북한산이다. 북한산의 대표 유적으로 북한산성이 있으며, 태고사·중흥사 등의 절이 있어 그 중요성을 더하였는데, 중흥사에는 치영(緇營)이 있어 승병 400여명이 북한산성의 방어를 위해 고종 때까지 주둔하기도 하였다. 신라 진흥왕순수비가 서 있던 비봉이며, 지금은 서울 땅에 들어갔지만 삼천사의 마애불 등도 북한산을 대표하는 유적들이다. 특히 삼천사의 마애불은 잘 생긴 북한산에 견줄만한 비례와 자태를 뽐냄으로써 답사객과 신도들의 마음을 붙잡고 있다. 이 계곡의 한 벼랑바위에 부처님의 생명력을 불어넣은 사람은 과연 누구일까?
#소도둑을 용서하자
서오릉의 북동쪽, 역시 지금의 서울 땅에 '검암기적비(黔巖紀蹟碑)'가 있다. 지금 이 일대는 신도시 건설 계획으로 뒤숭숭한 듯 여기저기 구호를 적은 깃발들이 난무하고 있다. 다만 검암기적비 근처는 꽃을 재배하는 비닐하우스 밀집 지역이어서 꽃향기라도 바람에 흩날리니 그나마 다행이다.
조선 경종 1년(1721) 왕의 동생인 연잉군은 아버지 숙종의 탄신일에 맞추어 명릉(明陵)에 참배하고 돌아오다가 쉬고 있었다. 그때 어떤 사람이 황급히 소를 몰고 개울을 건너가고, 곧이어 급하게 뒤따라간 사람이 앞사람을 잡아 소도둑이라고 소리친다. 한순간의 일이었다. 소도둑은 흉년이 들고 춥고 배고파서 저지른 일이라고 사정했다. 연잉군은 수행한 담당자를 시켜 소는 주인에게 돌려주어 농사를 짓도록 하고 도둑은 관에 고발하지 말도록 하였다. 그렇게 처리하고 서울로 돌아오니 가마가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아들이 없으면서 병약한 경종의 후사를 잇도록 결정이 난 것이다. 연잉군은 뒷날 임금(영조)이 되어 이 날의 사건을 곱씹었다고 한다. 백성들이 모두 편안하고 넉넉하면 도둑은 저절로 없어질 게 아닌가?
정조 5년(1781) 왕은 증조부인 숙종의 명릉에 행차한다. 서오릉 가운데 하나이다. 이 곳에 이르러 할아버지인 영조의 소도둑 일화를 듣고 그 내용을 비석으로 남기려고 한다. '정조실록'에는 어제(御製)기적문(紀蹟文)을 어필(御筆)로 써서 내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서오릉에서 만나는 왕의 여인들
세조 3년(1457) 세조는 맏아들 장(璋)이 죽자 길지를 물색하다가 지금의 경릉(敬陵) 터를 직접 답사한 뒤 묘원을 조성하였다. 서오릉의 출발인 것이다. 할아버지 세종의 총애를 받다가 세조 1년에 세자로 책봉되었는데 그만 20세를 일기로 세상을 버린 것이다. 뒷날 아들인 성종에 의해 덕종으로 추존되었다.
경릉은 왕과 왕비의 능이 서로 멀찌감치 떨어져 있다. 게다가 왕릉과 왕비릉이 서로 바뀐 듯 위치며, 석물이며, 능의 형태가 완연히 다르다. 덕종의 능은 왜소하고 간소한 데 비하여 왕비인 소혜왕후의 능은 높은 언덕에서 남편의 능을 내려다보면서 갖출 것은 다 갖춘 당당한 능이다. 지나칠 정도로 크고 위엄있는 무인석 앞에서 답사반의 카메라들은 바쁘기만 하다. 세조는 즉위하면서 능제와 장례의 간소화를 주장하였는데, 그 첫 적용이 하필이면 맏아들이어서 덕종의 능이었다. 왕으로 추존된 뒤에도 태조의 조상들 예에 따라 격상시키지 않은 것이다. 반대로 소혜왕후는 남편이 왕으로 추존된 다음 왕비로 책봉되었다가 세상을 떠났으므로 왕릉의 예에 따른 것이다. 더구나 소혜왕후는 성종과 그의 형 월산대군의 어머니이자 세조의 공신 한확 선생의 딸 아니던가? 그 고모들이 본의 아니게 명나라 황실로 시집가서 그런지, '오버'한 무인석에서는 왠지 중국 냄새가 나는 듯도 하다.
#숙종의 부인들과 며느리
명릉(明陵)은 숙종과 제 1계비인 인현왕후의 쌍릉, 제 2계비인 인원왕후의 능을 함께 일컫는다. 인원왕후의 능은 쌍릉 왼편의 위쪽에서 쌍릉을 내려다보고 있는 듯한 모습이어서 조금은 얄궂기까지 하다. 그러나 본인이 숙종 곁에 묻히기를 소원하여 그리되었다고 한다.
익릉(翼陵)은 서오릉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데 오르다보면 영조의 넷째 후궁이며 사도세자의 어머니인 영빈 이씨의 수경원을 만난다. 익릉의 주인공은 숙종의 정비 인경왕후이다. 열 살 때 세자빈으로 책봉되어 숙종이 왕위에 오르자 왕비가 되었다. 그러나 영광도 잠시 숙종 6년, 20세 때 천연두에 걸려 여드레 만에 세상을 뜬다. 천연두 자체가 지구상에서 사라진 요즘의 기준에서 본다면 더없이 불행한 일이다.
서오릉에는 연세대 뒤편에서 옮겨온 수경원 말고도 경기 광주에서 옮겨온 대빈묘도 있다. 사극의 단골 주인공인 희빈 장씨의 묘이다. 한때는 숙종의 총애를 받아 아들(경종)을 낳고 왕비의 자리에까지 오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