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은 서울에서 관서대로를 따라 이북 의주로 가는 첫 길목에 자리한 시다. 한강을 건넌 1번 국도는 북한산의 북한산성과 한강 하류의 행주산성 사이를 외길로 나아가다 벽제를 지나면서 서북으로 향한다. 두 산성은 오랜 기간 각기 도성(都城)의 북쪽과 서쪽을 막는 관문(關門) 역할을 해 왔다.
북한산성 축조는 숙종 29년에 시작하여 37년인 1711년에 완료되어 훈련도감·어영청·금위영 등 삼군문(三軍門)이 그 관리를 맡았다. 북한산성은 당시 북벌정책으로 청나라의 위협이 예견되던 시국이었으므로 유사시 도성민의 도피처로 축조한 것인데, 가는 길도 험준하고 수용 면적도 협소하였기 때문에 반대가 끊이지 않았지만 워낙 강화 함락의 충격이 컸던 탓에 계획을 포기할 수도 없었다.
행주산성은 덕양산 자락에 한강을 맞대고 세워진 토성으로 강을 타고 서울로 들어올 때 통과해야 하는 마지막 방어선이다. 이 곳과 난지도 사이는 물길이 얕고 물 흐름도 느려 마치 호수 같은 느낌을 주었으므로 이를 행호(幸湖 또는 杏湖)로 불렀다. 강가의 주민들은 고기잡이로 생계를 꾸렸다. 겸재 정선이 그린 '행호관어(杏湖觀漁)'는 바로 이 광경을 담고 있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를 보면 웅어에 대해 나오는데, 속명으로는 위어(葦魚)라고 하며 이 곳에서 잡히는 특산물이다. 덕양구 행주외동 용정 서쪽기슭에 사옹원(司饔院)의 분사(分司)가 있었는데 늦은 봄이 되면 대궐 음식을 준비하는 사옹원 관리들이 그물을 던져 이 것을 잡아다가 임금에게 진상하였다. 주민들은 생선장수가 되어 '횟감 사라'고 소리치며 한양 거리를 돌아다녔다.
그러나 이 곳 강가는 잦은 침수와 범람으로 살기에는 편치 않은 곳이었다. 강가를 벗어난 지역은 온통 왕실 능원과 사대부 묘로 덮여있어 편치 않기는 매 한가지다. 1925년 을축년 대홍수 이후 '대보둑’이 축조되어 그나마 생활은 좀 나아졌지만 주민들은 여전히 부업을 하지 않고는 부족한 살림을 채울 수 없었다. 이들의 오랜 겨울철 부업은 소위 '갈땅’이라고 부르는 습지에서 나는 갈대로 공예품을 만들어 서울에 내다 파는 일이었다. 이것들을 지고 화전, 수색, 신촌, 그리고 '굴레방다리’를 거쳐 서울 '새문안’ 시장까지 걸어갔다고 하는데, 특히 화전을 통과할 때면 그 곳 이씨 반촌(班村) 사람들에게 텃세를 당했다고 하니 가난한 백성에게도 도성의 관문은 따로 존재했던 것이다.
그 '갈땅’에 일산 신도시가 계획되고 아파트단지가 들어서면서 고양에는 많은 문인, 언론인들이 살게 되었다. 이들 덕에 고양시의 민원이 가장 빨리 보도되고 해결된다는 우스개 소리가 회자된 적도 있다. 고양은 송강 정철(1536~1693)과 석주 권필(1569~1612)이라는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문인 두 분이 머물렀던 곳으로 그 오랜 역사적 내력을 보더라도 '문인의 고장’이라고 부를 만하다.
송강이 살던 곳은 새원(新院)이라 하여 임금 행차 때 점심을 드시는 주정소(晝停所)가 있던 길목이다. 즉, 서울에서 개성을 가려면 홍제원(弘濟院)→박석고개→새원→ 벽제역(碧蹄驛)→분수원(分水院)→광탄(廣灘)→파주(坡州, 宿所)→임진(臨津)→장단(長湍, 晝停所)을 거친다. 박석고개는 갈현동에서 구파발로 넘어가는 고개로, 풍수상 서오릉의 결인(結咽), 즉 목구멍에 해당하기 때문에 산맥이 깎이지 않게 박석을 깔아놓았다.
파주에 살던 우계 성혼(1535~1598)은 송강보다 한 살 위다. 그래서 송강이 지은 다음의 단가(短歌)는 더욱 실감나게 다가온다.
“재너머 成셩勸궐農롱 집의 술닉닷 말 어제듯고/ 누은쇼 발로 박차 언치노하 지즐 타고/ 아~야 네 勸궐農롱 겨시냐 鄭뎡座좌首슈 왓다 하여라”
여기서 '언치’란 소나 말의 등에다 얹혀 두는 담요같은 방석을 말한다. 권농(勸農), 즉 권농관이나 좌수(座首)는 별 볼일 없는 향촌의 직책이니 자신들을 스스로 낮추어 부른 것이다.
송강은 16세 때인 1551년부터 10년간 할아버지 산소가 있는 전라도 담양 창평 당지산 아래에 머물며 과거 준비를 하면서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1510~1560),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 1527~1572) 등에게 가르침을 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고봉과의 사제관계는 납득이 잘 가지 않는다. 나이 차이도 그러하거니와 송강이 전라도에 머문 그 기간에 이미 고봉은 관직생활로 나아간 상태였다. 고봉의 호가 덕양(德陽)과 함께 고양의 옛 지명인 것처럼 행주(幸州) 기씨(奇氏)들은 고려 때부터 고양의 세거 거족이었다. 송강과 고봉이 똑같이 전라도와 경기도 고양 양쪽에 연고를 둔 까닭에 그것이 언제 어디서였든 둘의 인연은 피해갈 수 없었을 것이다.
고봉은 서울 무악산과 연락하는 봉수대가 있던 산의 이름이기도 하다. 그 고봉산 아래 성석동에 석주 권필의 묘가 있다. 그가 송강의 묘를 지나며 지은 칠언절구 시 “공산낙목 우소소, 상국풍류 차적요, 소창일배 난경진, 석년가곡 즉금조(空山落木 雨蕭蕭, 相國風
고양(2)-도성의 관문·문인의 고장
입력 2004-07-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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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7-05 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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