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분단의 현장, 그 응어리로 하여 반세기를 하루같이 이산가족의 아픔을 대변하는 것이 오늘의 파주시이다. 분열, 통합의 궤적을 걸어온 민족사의 어제, 임진강을 가슴으로 안고 통일의 길목을 여는 파주산하의 살아있는 미소를 본다. 답사팀의 여정이 분단의 현장, 자유의 다리를 바라보며 망배단을 둘러보는 이심전심의 시간이었다. 하루 3번 도라산역으로 가는 경의선 열차 시간표에서 한단계 앞당겨진 통일의 이정표를 보는 듯 하다.
경기산하 서북부를 수려하게 장식하는 '경기오악(京畿五嶽)'의 하나인 감악산(紺岳山)과 기나긴 역사의 흐름속에서 문화의 터전이 되어왔던 임진강의 물줄기에서 분출하는 경기산하의 생명력이 되살아 나고 있다. 선사시대인이 살았던 삶의 흔적이 처처에 남아있어 최적의 생활터전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는 곳, 뿐만 아니라 지리의 요충은 역사발전의 지렛대임을 일깨우듯 역사시대의 문화유산이 곳곳에서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쟁패이래 경기서북방의 전략거점이었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천혜의 조건을 고루 갖춘 지역이 파주의 지리와 문화환경이다. 산이 있고 넓은 들, 그리고 큰 강이 양쪽에서 흘러들기 때문이다. 한강과 그 지류라고 볼 수 있는 임진강은 파주를 감싸고 돌아 바다로 흘러드는 형상이다. 바닷물도 강을 따라 육지 깊숙히 들어오는데 이러한 해수(海水)와 육수(陸水)가 접합하는 물의 환경은 풍부한 자연생태계의 보고가 될 수밖에 없는 지리적 조건이다. 지리에서 역사와 문화가 태동되었던 현장, 인류문화의 흔적인 선사시대 유적을 살펴본다.
청동기 시대는 인류가 청동으로 도구나 무기를 만들어 쓰기 시작한 때로부터 철기를 만들어 쓰기까지의 기간을 말한다. 청동기시대 주민들의 풍습을 말해주는 고인돌, 석관묘, 토광묘, 무문토기 등 청동기 유물은 한반도 전역에 걸쳐 발견되고 있다. 파주지역의 다율리, 당하리, 덕은리는 고인돌의 밀집지역이고 옥석동, 당동리 등지에서 발견된 토기, 석기 등은 중부지방 청동기 문화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교하리 주거지에서는 무문토기, 공렬문토기가 출토되었다. 그 구조는 간단하여 움바닥을 둥글고 오목하게 만들었고 두 개의 화덕자리가 보인다. 이 밖에 교하리 주거지에서는 빗살무늬토기가 발견된 점이 특징이고, 옥석동 주거지에서는 가락바퀴, 숫돌, 갈돌 등 다양한 종류가 출토되었다. 이는 파주지역 청동기인들이 농경을 하였다는 증거이다.
파주일원에서 확인되는 초기 철기시대 유적은 적성면 주월리, 문산읍 선유리, 월롱면 영태리, 조리면 뇌조리 등지에서 발견되는 주거시설이다. 철기시대의 시작은 삼한(三韓)이 태동하여 한반도에 정착하는 시기다. 파주지역은 삼한시대 진국(辰國)의 터전이었다. 고조선인의 세력을 바탕으로 한 연맹왕국이었던 위씨조선이 멸망한 후 위만조선에서 남하하는 대규모 유이민(流移民)을 받아들이면서 철기문화를 꽃피웠던 곳이다. 그 후 마한(馬韓)때는 천관우의 '고조선사 삼한사'연구에 의하면 54개의 부족국가 가운데 원양국, 상외국으로 비정하는 견해를 밝히기도 하였다. 아무튼 임진강을 국경선으로 했던 고구려, 백제, 신라의 저 화려했던 민족문화의 웅비, 그 치열했던 각축의 현장, 삼국시대 파주를 개관해 본다.
처음에는 백제의 영향권에 있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말갈추장 소모(素牟)가 엄습해오자 백제 건국시조 온조왕이 군대를 거느리고 파주의 칠중하(七重河), 지금의 적성면 소재 칠중성(七重城)에서 역전시켜 소모를 생포하여 마한의 맹주에게 보냈다는 기록에서 알 수 있다. 이 시기 백제는 북쪽에서 침공해오는 낙왕, 대방군, 말갈의 침공을 막으면서 독자적으로 마한이 아닌 백제 연맹체의 일원으로 성장해 갔다. 백제가 인접한 북방세력과 잦은 충돌을 하면서 파주일원을 확보한 것은 풍부한 경제적 약탈을 목적으로 하여 침입해오는 북방세력을 방어하는데 있었다. 때문에 백제의 북방방어선은 임진강이었다. 임진강이 지니는 군사 지리적인 비중은 임진강을 사이에 둔 도하(渡河)와 저지(沮止)의 상반된 요해처이기 때문이었다.
이제 삼국시대 파주의 관방 요충 오두산성(烏頭山城-지금의 통일전망대)과 칠중성에서 치열했던 백제와 고구려, 고구려와 백제, 신라와 고구려의 공방전을 관람해 본다. 백제는 4세기 중반이후 근초고왕이 등장하면서 고구려와의 치열한 전쟁으로 하여 파주지역의 전략상 비중이 급증하였다. 오두산성과 칠중성의 위치가 부각된 것이다. 369년(근초고왕 24) 백제군은 남하해 오는 고구려군을 파주~평양 축선인 황해도에서 기습, 대승을 거두었고 371년 평양전투에서는 고구려 고국원왕을 전사시킬 정도로 대고구려전에서 우세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375년 백제의 영토였던 황해도 수곡성(水谷城)을 함락시킨 고구려는 백제의 북변을 공략했다. 이때 고구려군의 주 공격목표가 지금의 경기도 북방과 파주일원인 오두산성과 칠중성이었다.
파주(1)-산하에 투영된 민족사의 궤적
입력 2004-05-3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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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5-31 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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