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두천시의 외곽은 크고 작은 산들로 둘러쳐져 있다. 탑동계곡의 칠봉산, 해룡산을 비롯해 왕방산, 국사봉, 소요산, 마차산 등. 양주시 쪽으로 열려 있는 남쪽과 연천군으로 이어지는 북쪽으로만 큰 통로가 이어져 3번 국도와 경원선 철로가 지나고 있다. 사실 그 통로는 아주 오래 전에 형성된 신천에 의해 개설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러다보니 큰 비가 내리면 사방에서 중심으로 모여드는 물 때문에 '난리'가 나는 것도 동두천의 숙명 아닌 숙명이다.
동두천의 그 많은 산 가운데 동두천을 대표하는 산은 단연 소요산이다. 해발 높이로만 친다면 국사봉, 왕방산, 해룡산, 수위봉에 이어 중간 밖에 되지 않는데 '왜 동두천 하면 소요산'이라는 등식이 성립하는 것일까?
요즘엔 '웰빙' 때문인지 등산 인구가 많이도 늘었다. 그러나 등산이 본격화되기 전부터 사람들이 즐겨 찾던 산이 소요산이었다. 서울에서 경원선 기차를 타고 소요산 역에서 내리기만 하면 바로 소요산의 품으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청량폭포와 원효폭포 등 시원한 물줄기를 토해내는 폭포와 원효대사, 요석공주의 지고지순한 사랑이 묻어있는 자재암 등의 경승지가 있었기에 더욱 그랬다.
소요산이라는 이름은 또 어떤가? '소요(逍遙)'라 함은 '기분 내키는 대로 거닐다', '바람을 쐬다', 혹은 '자적(自適)하여 즐기다'라는 뜻 아닌가. 세상에 구애받지 않고 유유자적하는 스님들의 삶을 빗대기도 하여, '소요복(逍遙服)'이라 하면 스님의 옷, 가사(袈裟)를 뜻하기도 하고, '소요자재(逍遙自在)'라고 하면 '구속됨 없이 자유로이 소요함'을 뜻한다. 요즘 같은 황량한 세상에 이 얼마나 좋은 이름이랴! 게다가 소요산에는 자재암(自在庵)까지 있어 그야말로 '소요자재'인 산이다.
#원효대사와 의상대사
자재암은 원효대사와 의상대사의 얼이 깃든 전설의 절로도 유명하다. 대개의 사찰이 그 격을 높이기 위해 원효대사나 의상대사, 혹은 도선국사 같은 고승들을 끌어들여 창건주로 숭앙하고 있다. 그러나 자재암은 한 술 더 떠서 원효대사의 창건에 의상대사의 수도처로 두 대사를 '모시고' 있다. 또한 원효대사가 수행하는 동안 요석공주가 아들 설총을 데리고 와 머물렀다는 전설의 궁터가 있어 원효대사의 창건을 기정사실화 하고 있다. 미수 허목(許穆, 1595~1682)이 쓴 '소요산기'에 요석궁에 관한 기록이 있고 위치는 원효폭포에서 서북쪽으로 80장이라고 하였다.
원효대사(617~686)는 28세 되던 645년 서라벌의 한복판에 있는 황룡사로 출가한다. 역시 같은 해 같은 서라벌의 황복사에는 20세의 의상대사(625~702)가 출가한다. 이 때는 황룡사에 구층탑이 세워져 선덕여왕의 다소 약해 보이는 정치력을 부처님의 힘으로 보완하고 있던 무렵이다. 80여m의 높이로 우뚝 서 있는 황룡사 구층탑은 서라벌 어디에서나 보이게 마련이었고, 신라 사람들에게는 무한한 자신감과 자긍심을 불러 일으키는 존재였다. 반대로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는 위협적인 요소가 되어 '기죽이는' 존재였다. 더구나 한 층 한 층마다 이웃 아홉 나라를 설정하여 신라를 지키는 상징으로 삼지 않았는가? 통일 이전의 구심점인 황룡사 구층탑에 매료되어 출가한 사람이 바로 원효대사일 것이다.
#정치지도자와 종교지도자들의 아름다운 만남
원효대사와 의상대사는 서로 의기 투합하여 함께 당나라로 유학을 가다가 실패한다. 그리고 다시 한 번의 도전에서 원효는 '해골'에 담긴 물을 마시고 국내 수도에 전념하고, 의상대사는 중국 유학에 성공해 10여 년 만에 귀국한다. 이후 순수 국내파 원효대사와 국외파 의상대사는 신라의 불교를 이끌어가는 두 수레바퀴가 된다. 가급적 낮은 곳으로 가서 민중불교를 이끌어가는 원효대사와 임금을 비롯한 권력층 지도자들을 교화시키려고 노력하는 의상대사의 두 축이 구축된 것이다.
민중들이 불교에 쉽게 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원효대사는 240여 권의 저술을 내놓았다. 더구나 민중들의 삶에 보다 가까이 접근하기 위해 요석공주를 전설같이 얻어 아들 설총을 낳기까지 한다. 때로는 길거리에서 편안하게 설법을 하고, 때로는 사찰에서 위엄 있게 불법을 펼쳐 나갔다.
의상대사는 당나라가 신라를 도와 백제, 고구려를 평정한 후 신라마저 손아귀에 넣으리라는 정보를 입수하고 귀국하여 임금에게 대비하도록 한다. 이후 낙산사와 부석사를 창건하고 화엄종 사상을 널리 펼친다. 임금(문무왕)이 고마움의 표시로 내려준 전답과 노비까지 단호히 거절하고 수도와 포교에 전념한다. 그리고는 당나라까지 몰아내고 얻은 실질적인 통일 이후에 문무왕이 심혈을 기울이던 도성 건설을 반대하고 나선다. 사실 문무왕으로서는 역사상 처음으로 얻은 통일정부의 위상을 드높이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서라벌에 웅장한 성을, 보란 듯이 건설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 소식을 들은 의상대사는 글을 보내 성의 건설을 저지시킨다.
동두천(2)-소요하며 자재하고픈 동두천
입력 2004-08-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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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8-02 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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