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잠잠해지는가 싶던 개헌(改憲)문제가 다시 수면위로 떠올랐다. 먼저 임채정 국회의장이 말문을 열었다. 전국이 물난리를 겪던 지난 달 17일, 제헌절 경축사를 통해서다. 그는 “이른 시일안에 국회의장 자문기구로 가칭 ‘헌법연구 조사위원회’를 구성하겠다”고 공언했다.
기다렸다는듯 김근태 열린우리당 의장이 재빨리 배턴을 받았다. “대통령 4년 중임제만 도입하는 원포인트 개헌을 하자”고. 얼마간 뜸을 들이는가 싶더니 이번엔 한명숙 총리가 나섰다. “개헌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다. 국회의원 선거와 대통령 선거간 불일치 문제랄지, 단임제에서 중임제로 가는 두가지 문제는 필연적이 아닌가 생각한다”고 지원발언을 했다.
최대 야당인 한나라당은 곧바로 정략적이라고 받아쳤다. 정계개편 노림수가 숨겨져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지금은 개헌을 논할 때가 아니다. 다음정권에서 논의하자”고 했다. 결국 시기가 문제이지, 개헌의 필요성엔 일단 공감하는 것처럼 들린다. 다만 내년 대통령 선거를 앞둔 시점에서, 개헌을 지렛대 삼아 정치구도를 재편하려는 속셈이 아닌가, 의심하는 것 같다.
대체로 국민 반응은 아직 무덤덤한 편이다. 지난 1987년 ‘대통령 5년 단임제’개헌 이후, 대선만 앞두면 으레 불거져 나온게 개헌론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엔 예전과는 다소 다른듯 싶다. 여권에서 연방 붙잡고 늘어지는 게 아무래도 심상찮아 보여서다. 더구나 참여정부 들어서 걸핏하면 거론되다, 여차하면 움츠러들곤 해왔기에 더 그렇게 느껴지는지도 모르겠다.
개헌이라면 지레 긴장하는 국민도 꽤 있다. 무엇보다 1952년 부산 정치파동을 거친 발췌개헌, 1954년 ‘대통령 중임제한’철폐를 위한 이른바 4사5입 개헌, 1969년 날치기로 통과된 3선개헌, 1972년 공포분위기속에 이뤄진 유신헌법 등이 생각나서다. 그 네번이 모두 독재자의 장기집권을 노린 헌법 고치기였던 것이다.
물론 지금은 그때와 같은 독재시대가 아니다. 또 무엇이든 불편하거나 잘못된 점이 있다면, 마땅히 고쳐져야 한다. 그러므로 개헌에 무작정 경계심부터 느낄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현행 ‘대통령 5년 단임제’는 제대로 일도 하기 전에, 초반부터 레임덕에 빠질 우려가 아주 없지 않다. 대통령과 국회의원 선거시기가 다를 수밖에 없는데다 지방선거까지 겹치다 보니, 자칫 선거만 치르다 정작 국정은 뒷전에 밀릴 수도 있다.
따라서 ‘대통령 4년 중임제’로 국회의원과 동시 선거를 치를 수 있고, 대통령 역시 레임덕 걱정을 미룬 채 소신껏 국정에 임할 수 있다는, 여권의 논리에 일면 수긍이 가는 점도 있다. 한편 몇몇 개헌이 집권연장 수단으로 이뤄져 왔고, 이번 논의도 정계개편의 지렛대가 될 공산이 없지 않다는 데서, 한나라당이 경계하는 것 또한 무리는 아니다. 물론 이런 태도 역시 정략으로 볼 수 있을지 모르지만.
납득하기 어려운 건 여야 모두 국민은 제쳐둔 채 자기들끼리만 “하자” “말자”며 다투고 있다는 점이다. 민주국가의 헌법은 어디까지나 국민을 위한 국가 기본법이다. 국민을 뺀 정치인들만의 이해타산으로 될 성질의 일이 아니다. 정말 개헌이 필요한지, 그러면 무엇을 어떻게 고칠지, 시기는 언제가 좋을지 등 국민의 뜻을 먼저 묻는 게 순서다. 그리고 국민적 합의를 도출해내야 한다. 당리당략으로 다툴 일이 아니다.
국민 뜻을 묻는데는 여러 방법이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시민사회와 학계를 통한 논의를 비롯, 광범한 설문조사 및 공청회 등등. 하지만 지금 무엇보다 먼저 풀어야 할 건, 갈수록 악화되는 경제상황 및 어려운 민생문제라는 점을 우선 염두에 두었으면 한다. 수해복구 대북한문제 한미FTA 등도 조속한 해결을 기다리고 있다. 개헌문제로 다툴 여유나 있는지 모르겠다.
/박 건 영〈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