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천500년 전 일이다. 당시 민주정치가 한창 무르익던 도시국가 아테네엔 ‘도편 추방제’라는 자못 흥미로운 제도가 있었다. 시민들이 추방하고 싶은 사람의 이름을 도자기 파편에 써서 투표하는 제도였다. 해마다 이 투표에서 과반수의 찬성을 얻으면, 그 권위와 권력이 위험하다고 간주되는 인물을 10년간 국외로 추방했다. 민주정치가 자칫 몇몇 사람의 독단으로 변질될 것을 예방하는 장치였다.
어느날 투표장에서 정계 거물인 아리스티데스에게, 한 사내가 도자기 파편을 내밀며 말을 걸어왔다. “여기에 아리스티데스라고 써주시겠습니까. 나는 글을 몰라서요.” 아리스티데스가 물었다. “그가 무슨 잘못을 했습니까”라고. 그러자 사내가 대답했다. “나는 그를 본 적도 없습니다. 다만 그가 위대한 인물이라느니, 정의의 사도라느니 하는 말을 하도 듣다보니 진저리가 나서요.” 아리스티데스는 아무말 않고, 자기 이름을 써주었다. 그리고 그해 그는 추방됐다. 일본의 여류작가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에 나오는 에피소드다.
참 많은 것을 느끼게 해준다. 무슨 일만 터졌다 하면 “모른다” “나는 관계없다”면서 군색한 변명으로 이어지고, 심지어 `네탓'타령으로 날새는 줄 모르던 경우들을 하도 많이 보아와서다.
몇년 전 외환위기 때도 꼭 그랬다. 곳곳에서 위험 징조가 감지되는데도 나라의 지도자들은 뒷짐만 지고 있었다. 정작 기업들이 잇달아 무너지고, 외환 보유고가 바닥이 나자, 그때서야 갖가지 변명과 책임 떠넘기기에 여념들이 없었다. 세계적 추세라 어쩔 수 없었다느니, 잘 하려 했어도 발목잡는 이들이 너무 많았다느니 하면서. 그러는 사이 죄없는 백성들만 수도없이 일터에서 쫓겨나고, 사업장을 엎어버린 채 길거리에 나앉아야 했다. 숱한 가정이 무너지고 노숙자가 쏟아져 나왔다. 나라는 나라대로 신용이 추락된 채 뒤늦게 남의 돈 꾸어오느라 허둥댔다.
지금 나라를 온통 뜨겁게 달구고 있는 ‘바다 이야기’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벌써부터 사행성 도박 폐해에 대한 경고가 수없이 나왔지만, 누구도 귀 기울이지 않았다. 무려 300만이 넘는 도박 중독자가 양산되고, 패가망신이 속출하며 나라가 온통 뒤집히고서야 뒷북을 치며 법석들이다. 누군가 희생양을 찾아 `네탓' 따지기를 벼르는 모습으로 말이다. 책임지겠다는 이들은 아직 아무도 없어 보인다.
요즘 백성들의 삶은 또 어떤가. 이미 몇년 전부터 경제가 어렵다는 호소가 곳곳에서 흘러나왔다. 그런데도 “언론과 야당이 공연히 위기를 조장한다”며 남의 탓만 해왔다. 그러다 지금 어떤 지경에 이르렀나. 우리 경제는 국내총생산(GDP) 규모에서 재작년 세계 10위 자리를 인도에 내주었다. 작년엔 11위 자리마저 브라질에 내주고 12위로 떨어졌다. 수출 생산 소비 모두 허우적거린다. 경기가 계속 곤두박질 치니 일자리 구하기도 하늘의 별 따기다. 자영업인들 잘 될 리 없다. 문닫는 가게들이 하나 둘이 아니다.
당연한 결과로 백성들은 빚더미만 쌓여간다. 올 2/4분기 가계빚 규모가 무려 546조원으로 사상 최고치를 경신했다. 2002년 개인신용 대란의 악몽을 다시 떠올리게 한다. 올 상반기 중 개인파산 신청자가 자그마치 5만명에 육박, 이 역시 사상 최대치다.
이제는 정부도 어쩔 수 없었나 보다. 내년엔 올해보다 더 어려워질 것이라고 털어놨다. 얼마나 심각하면 경제부총리의 대국민 사과까지 나왔다. 일부에선 IMF한파 때보다 더 힘들다고들 하는데, 어떤 변명, 누구 탓이 쏟아질지 일면 궁금하기도 하다.
그 옛날 아리스티데스는 아무 것도 안 따지고 변명도 늘어놓지 않았다. 누구 탓도 안했다. 오로지 책임만 졌다. 그래서인지 3년 뒤 시민들 요구로 다시 아테네로 돌아왔다.
마침 정기국회가 열리고 있다. 내로라 하는 의원님들 조목 조목 잘 짚어주리라 믿는다. 그러다 보면 이 어려움에서 벗어날 좋은 수도 나올지 모르고. 일단은 기대를 품어보자.
/박 건 영(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