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호용 (가천의과학대 의료경영학부주임교수)
'빨리빨리'와 '냄비근성'으로 표현되는 우리네 의식구조는 늘 쏠림현상을 야기하고, 이는 우리 경제와 사회를 원치 않는 곳으로 몰고 갈 수 있는 위험한 요인으로 인식하고 있다. 무엇인가 흥미를 끌고 이득이 있다 치면 우르르 몰려갔다가 그게 아니다 하면 썰물처럼 사라지는 현상을 보고 냄비 끓듯 한다고 한탄한다. 일견 사회 곳곳에 나타나는 냄비현상은 우려를 자아내기도 한다. 사람이 유일한 자산으로서 다방면에 기여할 다양한 인재가 필요한 이때, 입시철만 되면 우수한 젊은이들이 의대로만 쏠리는 현상은 우리의 미래를 어둡게 하기는 한다.

그러나 이러한 냄비근성이 어둡기만 한 것인지 살펴보자. 우리의 경제는 세계 유래없이 짧은 기간 동안 고속으로 성장해왔다. 이러한 성장의 뒤안에는 우리의 냄비근성이 자리잡고 있음을 본다. 성장을 위해서라면 비록 삼풍백화점처럼 무너질지언정 건물과 도로를 우후죽순처럼 사방으로 건설해 왔다. 급조된 도로는 일 년도 가지 않아 구멍나고 무너져가면서도 땜질하며 사용하였다.

독일 같은 선진국은 도로를 만들 때 충분한 시간을 두고 설계하고 시공도 1m가 넘는 깊이로 단단히 하여 내구성이 좋다고 한다. 그래서 건설 시간과 비용이 만만치 않다. 그러나 사람이 하는 일에 완벽이 있는가! 선진국도 예외는 아니다. 이런 나라를 다시 고칠 때는 엄청난 비용을 감수해야 한다. 이에 비해 우리나라는 냄비근성으로 뚝딱 만들었기 때문에 다시 부수는 것은 일도 아니다. 그리고 하루사이에 원상복귀가 된다. 출발이 늦어 시행착오가 불가피한 우리 여건에서 냄비근성은 장점이 아닌가?

일본의 평론가 사카이야 다이치는 '지가사회(知價 社會)'에서 조직이 죽음에 이르는 요인 중의 하나를 환경에의 과잉적응으로 본다. 과거 공룡이 번창할 때 지구의 환경은 매우 온화하고 먹을 것이 풍부했다. 공룡은 이러한 환경에 푹 적응하면서 거대한 몸집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온화한 세상은 갑자기 무엇 때문인지 춥고 혹독한 환경으로 변해 버렸다. 온화한 기후에 과잉 적응하며 몸집이 커진 공룡이 슬림화하기에는 너무 시간이 짧았던 탓인지 멸종하였다고 한다. 조직이나 사회도 마찬가지이다. 주어진 환경에 과잉 적응하여 환경변화에 빨리 변하지 않으면 죽음에 이른다는 것이다.

일본은 선진국이 되기까지 100년이 넘게 걸렸다. 또한 일본은 기초부터 차분히 다지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는 문화를 갖고 있다. 일본은 그동안 환경에 과잉적응하여 규모도 크고 일본 특유의 집단문화가 있던 탓인지, 위기를 탈출하는데 10년 이상이 걸렸다. 이에 비해 우리나라는 과잉적응과는 거리가 멀다. IMF위기를 맞이하여 냄비근성으로 금도 모으고 바뀐 환경에 재빨리 적응하여 2~3년만에 극복하였다. 또한 축구의 역사가 상대적으로 짧은 우리나라가 2002년 월드컵 때 보인 성과는 냄비효과의 축적된 에너지라고 이해할 수는 없는지?

우리의 문제는 냄비근성이 아니다. 냄비처럼 끓어야 만하는 우리네 삶의 에너지를 담고 바른 방향으로 유도할 제도의 부재가 문제이다. 의대로 쏠리는 이유는 한번 졸업하면 경쟁 없이 안정된 생활을 보장하기 때문이고 공공기관으로 인재가 몰리는 이유는 한번 들어가면 경쟁 없이 안정된 철밥통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 의대나 공공기관으로 몰리는데 민감할 필요는 없다. 외부로부터 개방의 거대한 물결이 모든 분야에 무한경쟁을 불어 넣기 때문이다. 개방이 된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냄비 효과를 유도할 국내의 제도적 개혁이다. 개혁의 방향은 모든 조직이 개방되고 공정한 경쟁의 룰이 적용되는 제도의 마련으로 나아가야 한다. 여기서 제도는 규제를 의미하지 않는다. 규제는 철밥통을 만들고 냄비처럼 끓지 못한다. 누구든지 게으르면 내몰릴 수 있고, 인재라면 언제든지 일할 수 있는 개방적 제도이어야 한다. 유연한 제도 속에서 우리의 냄비근성은 환경변화에 재빨리 적응하면서 성장의 거대한 원동력이 될 것이다.

/박 호 용(가천의과학대 의료경영학부 주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