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문객 한 명 없는 고 김옥순 할머니 장례식장 빈소에는 생전 모습을 담은 영정사진 하나 없이 할머니의 이름이 적힌 위패와 성경책만이 쓸쓸히 놓여 있다. /최재훈기자·cjh@kyeongin.com
5일 오후 2시30분, 고양 벽제 화장터. 잔뜩 찌푸린 잿빛 하늘 속으로 하얀 연기가 날아 올랐다. 화장은 불과 5분만에 끝이 났다.

가족도, 친척도, 친구도 하나 없던 김옥순(61) 할머니는 그토록 자주 바라보던 하늘로 연기가 돼 사라졌다. 한 평생 '양공주'라는 낙인을 가슴에 안고 고통스런 삶을 살아온 김 할머니는 서로 의지하며 함께 살았던 의정부 기지촌 빼벌 할머니들을 뒤로 한 채 이렇게 떠났다. 곡소리도, 조문객의 나지막한 소근거림도 없었다. 단지 기자와 봉사단체인 두레방 관계자 서너명만이 이날 화장을 지켜봤다.

김 할머니의 사연은 경인일보가 미군이 떠난 후 기지촌에서 힘겹게 삶을 이어가고 있는 소위 양공주 출신 기지촌 할머니들의 애환을 기획보도한 '恨 많은 음지인생, 기지촌할머니들 고단한 삶(경인일보 5월8일자 3면 보도)'을 통해 세간에 알려졌다.

한국전쟁으로 부모를 잃고 9살 때부터 식모살이하며 살아 온 김 할머니는 20살때 쇠를 깎는 공장에서 일하면서 쇳가루가 눈에 들어 가 한쪽 눈의 시력을 잃었다.

다행히 한국 남성을 만나 한때 단란한 가정을 꾸리기도 했지만 행복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남편의 폭행으로 유산까지 한 김 할머니는 이후 집을 나와 기지촌 생활을 시작했고 이곳에서 다시 미군병사를 만났다. 하지만 아이를 낳을 수 없었던 김 할머니는 미군에게마저 버림 받았다.

누군가를 사랑할 수도, 사랑 받지도 못했던 김 할머니는 미군철수 후 더이상의 기지촌 생활이 싫어 식당과 공사장 노동일을 전전했다. 하지만 폐병과 관절염으로 만신창이가 된 몸은 더이상 버텨주지 못했다.

정부가 주는 기초생활수급비로 근근이 삶을 이어오던 할머니는 폐암선고를 받고 일주일도 안돼 이렇게 한 많은 인생을 등졌다. 두레방 관계자는 "젊었을 적 사랑했던 미군이 비행기를 타고 떠났다고 해서 늘 하늘을 보며 소원을 빌었는데 결국 수술비가 없어 눈을 뜨지 못했다"며 "인생을 선택할 자유도 사치였던 과거 기지촌 여성들이 또다시 이렇게 홀로 떠나는 걸 보게 돼 너무나 가슴이 아프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