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늘 아래 끝동네'라 해도 고개를 끄덕일 만큼 깊은 강원도 양양 응복산 미천골. 설악산~점봉산~조침령을 거쳐 구룡령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 능선 왼편 자락이지요. 일 년 동안 인연을 맺고픈 꽃차를 마련하기 위하여 주말에 다녀왔습니다. 10㎞가 넘는 계곡을 걷다가 드디어 제 마음을 추스를 자리를 잡았습니다. 빠른 여울이 암반을 쓸고 내려오다 높다란 바위에 부딪혀 소(沼)를 만들고 부드러운 물길이 되어 내려가는 곳. 순간 찌릿하며 머리를 치더군요. 소 가운데 서 있는 바위에서 제가 할 역할을 보았습니다. 유연한 처신. '너희들이 독을 먹여도 난 꿀로 내뱉는다.'
황홀하고 벌렁거리는 가슴을 안고 한참을 내다르다 숨을 고른 곳이 선림원지였습니다. 미천골에 오는 제일 목적이 이곳 때문이죠. 각도를 다르게 하여 사진을 찍다보면 피사체 자체의 정체가 확 바뀌는 경험을 하게 되는데, 낯익음이 낯설게 되는 창의적 상이 발현되는 순간입니다. 선림원지 풀밭에 누워 바라보는 조봉. 쏟아질 듯 밀려오는 그 울울창창함은 내장산 벽련암 정자 마루에 뒤통수를 대고 눈을 떴을 때의 경이로움과 비길만하지요.
선림원지에 올 때마다 서울 강남이 중첩됩니다. 선림원이 전성기였을 때가 9세기 중반 통일 신라시대입니다. 당시 기득권층이고 지식인이라 할 수 있는 승려들이 이 깊은 골짜기에 몰려들었다는 것이죠. 쌀(米) 씻는 물이 계곡을 가득 채웠다고(川) 해서 이름이 미천골. 당시는 장보고가 활약하여 자유무역이 성하던 때였죠. 천 년이 더 지난 지금, 어른이나 아이들이나 욕망을 좇아 강남으로 몰려갑니다. 강남에 끼어들지 못한 사람들은 강남을 시기하면서도 강남을 선망하는 야누스적 욕망구조를 버리지 못합니다.
요즘 부자 나라들 경제가 힘들다는 소식을 접할 때마다 옛 생각이 납니다. 제가 공부를 마치고 귀국한 때가 1998년이니 대한민국이 외환위기로 끙끙 앓던 때였지요. 인사차 여행을 하다 보니 왜 우리가 위기를 맞았는지 알 수 있더군요. 대한민국은 길이나 골목이나 모두 파헤쳐서 전국이 공사장이요, '가든'이다 '장'이다 하여 고급 음식점과 러브호텔이 빼곡했지요. 여기에 정부까지 한 몫 한다고, 지자체마다 크고 고급스런 청사를 지어대고 있더군요. 나라가 망하지 않는 게 이상한 거였지요.
2011년 가을. 환율이 1천200원 대를 육박하고, 국가부도위험이 빠르게 커지고 있다지요. 비정규직, 전월세, 대학등록금 문제는 식상할 정도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래도 1천만원 짜리 가방을 사려는 대기자가 1천명이 넘고, 비즈니스를 하려면 명함보다 상대방이 차고 있는 명품시계를 먼저 확인하는 풍조가 되고 있지요. 그런 사람들에게 경제 불황과 위기경영은 소득의 격차를 더 벌릴 수 있는 기회의 양극화가 되고 있는 판국이네요.
선림원지에서 조봉을 바라보니 창공에 천마도 모양의 구름이 한 점 떠올랐습니다. 사진기 셔터를 몇 번 누르고 나니 천마도는 이내 그저 그런 구름덩어리로 변하더군요. 한낱 바람 한 점에 그리 된 것이겠죠. 선림원은 900년 경 산사태 이후로 아직까지 폐허입니다. 잘 나가던 거기도 백 년을 못간 셈이죠. 세상살이도, 우리네 인생도, 돈과 자리와 명예욕도 한 순간이 아닐까요. 돌아보면, 우리네 욕망은 강남인데 갖춘 행색은 시계 하나 값에도 못 미치는 연봉을 받고 있는 것 아닙니까.
우리는 일정 정도 욕망에 배고파하는 좀비입니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여기까지 오는데 마흔아홉 해가 걸렸구나" 양양 출신 이상국 시인이 지은 '선림원지에 가서' 일부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제대로 인생길을 가고 있는지요? 길을 묻자면 길을 떠나야겠지요. 이 가을 나만의 각도, 실현 가능한 욕망을 찾으시길 바랍니다. 돌아오실 날 기다리며 미천골 구절초차 한 모금 준비해 놓고 생각에 들어가렵니다. '꽃은 향기로 비우고, 나비는 춤으로 비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