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빠서 눈인사도 제대로 못하고 떠나보낸 B의 뒷모습이 눈에 밟혀 문자를 보냈습니다. '이번 인생여행의 화두로 삼으시게나.'
30대에 막 접어든 B는 곧 계약기간이 끝나면 실업자가 될 터입니다. 이른바 스펙으로 보면 빠질 것 없습니다. 인생과 일에 대한 열정은 최고입니다. 하지만 아예 기회가 주어지지 않습니다. 해외 유학까지 하면서 들인 정성과 노력이 낙엽마냥 나뒹굴고 있는 판입니다. 지금 한국에는 B로 넘쳐납니다. 한국개발연구원에서 발표한 최근 보고서를 보면 취업을 원하지만 노력을 하지 않는 사람을 포함하면 실업률은 20%가 넘는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실업률 통계로는 담아내지 못하던 상식과 체감이 입증된 셈이지요. 내년에 B도 국가의 '관리' 대상에서 제외되는 '열외자원'이 될 듯합니다.
B를 볼 때마다 마음이 싸해집니다. 제가 젊었을 때는 문제를 짚어내서 가열차게 비판하는 것만으로 사회적 책임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40줄이 넘고 보니 내책임이다라는 생각이 앞섭니다. 40대는 집, 직장, 사회에서도 중심이 되는 역할을 하지요. 통계를 보면 40대의 소득이 가장 높습니다. 그런데 행복도는 가장 밑바닥이지요. 구조적으로 40대는 남을 위하여 가장 많이 희생을 해야 하는 일벌의 운명을 벗어버리지 못하고 있지요.
이번 서울시장 선거에서 판을 결정지은 것은 40대이더군요. 지난 대선 때도 그랬지요. 좋게 표현하면 정치적 성향을 초월하여 세상을 살고자 하는 억척스러움이고, 나쁘게 말하면 경제적 기회주의라고 할 수 있겠지요. 돈에 따라 탄력적으로 운신하는 처세술은 자칫 역이용당할 수 있다는 각성이 앞서야 할 듯합니다.
요즈음 국제사회를 보면 머지않아 세상이 많이 바뀔 듯합니다. 경쟁과 효율을 앞세우던 시장자유주의가 한계에 달한 듯하지요. 무한경쟁과 승자독식 체제가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서겠죠. 자본주의의 심장인 미국에서 시작되어 유럽, 일본, 대한민국에서도 1%만을 위한 세상질서를 바꾸자고 야단입니다. 시장논리에 맡기면 알아서 경제도 살리고 사람들도 행복하게 할 수 있다는 신자유주의는 점점 더 모든 걸 돈으로 해결하려하고, 힘 있고 능력 있는 극소수만이 살맛나는 세상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곪으면 터지는 법. 칼 폴라니가 말한 '거대한 전환'이 지구 곳곳에서 터져 나오고 있습니다.
주말에 인제에서 양양으로 넘어가는 조침령길을 걸었습니다. 적상산 안국사 올라가는 길과 함께 제 마음을 온통 빨갛게 적셔주는 단풍길이지요. '늙는다는 것은 세상의 규칙을 더 이상 바꾸려고 노력하지 않는 것이다.' 실존주의 철학자 까뮈의 멘토로 알려진 장 그르니에가 한 말이지요. 아내와 두 자식의 가장으로서, 사회의 허리인 40대로서, 국민의 세금으로 먹고사는 경제학자로서 지금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생각하고자 떠난 길입니다.
이런 날, 마음을 같이 할 수 있는 사람들과 길을 걸을 수 있는 세상이 되기를 소망하며 작은 실천을 하기로 했습니다. 사회적 다단계를 시작하렵니다. 능력 없고 게으른 제 딴에 할 수 있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우선, 영화 도가니를 본 영수증을 가져오면 영화비를 드리겠습니다. 그 영화가 그 분의 마음을 움직였다면 그 분은 다른 분의 영수증을 저처럼 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지요. 그렇게 마음과 마음이 사슬이 되어 사회적 가치가 쌓이면 세상이 좋아지지 않을까요? 작지만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 수 있는 자양분이 되는 것이라면 책, 공연, 음반, 뭐든지 좋겠지요.
조침령길을 내려와 서림삼거리에 다다를 즈음 인생길을 묻고자 서해안을 걷고 있는 B에게서 문자가 왔습니다. 배시시 미소가 나오는 희망입니다.
[수신 메시지: 걸으면서 젖어드는 게 좋은 생각이라고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