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우복동천(牛腹洞天)을 품에 안은 백두대간 청화산
택리지의 저자인 이중환이 조선 최고의 명승지로 꼽았던 곳이 청화산 자락에 있다. 그는 자신의 호 조차도 청화산인(靑華山人)이라 칭하고 청화산 자락으로 들어와 살았다. 일명 '우복동천'이라 칭하는 곳인데 우복은 소의 배 안을 닮아서 사람이 살기 편안하며 동천은 산과 내가 둘러있어 경치가 좋은 곳이라는 뜻이다.
이러한 곳을 찾아 많은 이들이 전국 팔도를 유람하며 자신들의 힘겨운 삶의 위안을 찾고자 했다. 민초들의 삶은 여간 고달픈 것이 아니었다. 부귀영화를 쫓는 삶이 아니라 처절하게 삶을 영위하기 위한, 생존을 위한 노력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조선 후기에 들어서 몰락한 양반 가문의 자제들도 우복동을 찾으려는 시도가 있었던 것을 정약용(丁若鏞·1762~1836)은 '다산산문집' '우복동가(牛腹洞歌)'라는 시구절에서 다음과 같이 적어 놓았다.
속리산 동편에 항아리같은 산이 있어
옛날부터 그 속에 우복동이 감추어져 있었다네
산봉우리는 둘러싸고 골짝물이 천겹 백겹 굽이치고
여민 옷섶 겹친 주름 터진 곳도 없네
출입문은 대롱만큼 작은 구멍 하나라네
송아지가 배를 땅에 붙여야 겨우 들어갈 정도라네…(중략)
종이위에 누에 깔리듯 인구가 너무 많아
나무하고 밭 일구고 발 안닿은 곳 없으니
남아 있는 빈 산지가 어디에 있을겐가
아아 우복동이 세상 어디에 있겠는가.
아마도 다산은 우복동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현실적인 측면에서 주변 문제들부터 돌아보고 해결하면서 살아가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또한 "근세에 고가(故家) 후예로서 먼 지방으로 영락(零落)되어 와서 사는 사람들은 영달(榮達)할 뜻은 없이 오직 먹고 살아가는 일에만 힘쓰고 있다. 심한 경우는 새처럼 높이 날아가고 짐승처럼 멀리 달아나려고 하여 우복동(牛腹洞)만 찾고 있는데, 한번 그 속으로 들어가면 자손들이 노루나 토끼가 되어버리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다"며 다산이 제생에게 주는 말에도 우복동이 기술되어 있다.
유토피아 우복동을 향한 백성들의 마음을 이미 헤아리고도 남았을 다산은 오히려 현실개혁으로 마무리를 짓는다. 그러면서 세상을 이롭게 할 생각없이 오직 자신의 목숨 부지에만 연연하는 선비를 '멍청한 선비'라고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300여년이 지난 현재 우리 삶을 보더라도 다산은 같은 말을 하였을듯 싶다.
■ 초록의 바다를 떠도는 구름과 맞닿은 하늘금
산행의 시작을 늘재에서 하기로 한다. 백두대간 마루금도 밟아볼 요량으로 거대한 석조물 앞에서 폼내고 힘을 주어본다. 부지런히 발품을 팔아도 1시간30분은 훌쩍 지나야 정상에 오를 수 있는 길이라 천천히 여유를 가지며 모처럼 시간을 즐겨본다. 30여분 정도 오른 후 '정국기원단(靖國祈願壇)'이란 비석과 향로가 설치되어 있는 곳에 도착해 맞은편의 속리산 구간을 두루 감상하며 쉬어간다.

"일본 야스쿠니 신사도 같은 한자를 쓰는데 왜 저런 한자를 썼을까 의문이 드네요." 바닥에 쓴 한자가 '정국신사(靖國神社)'다. 휴일을 맞아 백두대간을 진행중이라던 박진용(49·서울시 영등포구)씨가 바닥에 써놓은 한자와 비석에 새겨진 한자를 가리키고 있다. 문제의 소지가 있어 보이는 까닭에 사진으로 기록해 두고 다시 걸음을 옮긴다.
그럭저럭 오를만 하던 길이 혀를 바닥까지 늘어뜨리도록 힘이 드는 길로 바뀌고 있다. 스틱에 의지하면서 호흡을 조절하며 힘겹게 정상에 서자 북쪽으로 조항산(951m)·대야산(931m)·둔덕산(970m)이 보이고 동편으로 시루봉(876m)과 연엽산(791m)이 지척이다. 마주보고 있는 속리산 암릉구간이 불꽃처럼 타오르는 모습으로 연상되며 멋진 풍경을 연출하는 청화산 정상은 일출 감상포인트로 손색이 없는 곳이기도 하다.
■ 천년고찰 원적사 아래 우복동
시루봉으로의 산행은 백두대간 능선을 따르다 오른편의 길로 찾아들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길을 잘 못들어 헤매는 곳으로 유명하다. 갈림길을 벗어나면 곧바로 전망바위에 도착하게 되는데 산행 중 가장 훌륭한 전망을 보여주는 곳이다. 웅장한 기운과 함께 드러나는 장쾌한 산줄기에 압도되어 숨이 멎을 지경이다. 게다가 옹골찬 힘을 모아 한 곳으로 모아놓은 듯한 모습의 시루봉에 서자 청화산의 진면목을 볼 수 있다.
바위마다 기운이 서리고 그 아래로 어미닭이 알을 품듯이 인간에게 안온한 품을 내주고 있는 모습이다. 이는 쌍룡계곡을 두고 마주한 도장산(830m)에서 시루봉과 청화산을 바라보면 그 모습을 더욱 극명하게 볼 수 있는데 필자가 3년전 도장산을 답사하였을 때 청화산이 주던 느낌과 같다. 화산 방향으로 서둘러 하산을 마친 후 봉축일을 맞아 원적사로 향하는 차량에 합승해 다시 청화산 방향으로 올라간다.
능선과 맞닿을듯한 높이에 위치한 원적사는 신라 무열왕7년(660년)에 원효대사가 창건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근래에는 대한불교조계종 종정을 지내신 서암(西庵)스님(1914~2003)이 50여년 동안 기거하셨던 곳이다.
일부러 찾아가지 않는 이상 산행중에 만날 수 없는 참선수행 도량으로 일반인의 출입을 금하고 있다.
■ 산행지: 충북 괴산 청화산(970m)
■ 산행일시: 2012년 5월 28일(일)
○ 산행안내
■ 등산로
늘재 ~ 청화산 ~ 대간갈림길 ~ 시루봉 ~ 비치재 ~ 장군봉 ~ 회란석(5시간)
■ 교통
경부고속도로 ~ 청원상주고속도로 청원JC ~ 화서IC ~ 수청거리삼거리 ~ 우복동